고전음악 트는 허름한 대폿집으로 시작
많은 스토리 품어 문화브랜드 가능성 커

오는 10월이면 마산 창동의 선술집 '만초집'이 문을 닫는다는 인터뷰 기사를 봤다. 슬펐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임대 계약이 그때 만료되기 때문이란다. 그곳을 운영하는 두 분 어른의 건강상태도 이유이긴 하다. 문을 완전히 닫은 건 아니지만 사실상 영업은 하지 않는 지금 상황도 애처롭다.

내가 만초집을 알게 된 건 '마산 원도심 스토리텔링 사업'을 하던 2011년이었다. 마산을 알고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이 허름한 선술집을 '대표적인 이야깃거리'로 지목했다. 하나같이 주인 조남륭 씨 이름 뒤엔 꼭 '선생'이란 직함을, 부인 엄학자 씨 이름 뒤엔 '여사'라는 경칭을 붙였다. 추억 한 토막을 이야기할 때도 예우와 존경이 묻어났다.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집이기에 다들 이렇게 칭송할까?

주인장 조남륭 선생 이야기부터 풀어야겠다. 조 선생은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와 평택을 거쳐 서울에서 살았다. 전쟁이 나기 전 열두 살 소년은 서울 종로통 음악다방을 통해 클래식 음악을 접했다. 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 와서도 음악실을 통해 클래식 듣기를 즐겼다. 대학생 때 외가였던 의령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부인 엄학자 씨를 만나 결혼했다. 1971년 자녀 셋과 함께 마산으로 이주하며 생계를 위해 문창교회 옆에 대폿집을 열었다. 간판도 없는 허름한 대폿집이었다.

조 선생은 그 집에서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대폿집을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필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가득 채웠다. 기막힌 반전 매력이었다. 마산 시내에 금방 소문이 났다. 마산의 예술인과 대학생들이 이 집을 찾기 시작했다. 2년 뒤 오동동 코아양과 맞은편 2층으로 이사했다. 단골들이 이곳을 '고전음악의 집'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간판이 됐다.

오동동 시절 '고전음악의 집'은 마산 예술인과 지식인들의 아지트였다. 서울로 떠난 유학생들도 방학이면 늘 이곳에 모여 시간을 보냈다. 유신 시대에는 대학생들이 모여 작전회의를 하던 곳이었다. 마산 출신 주대환 씨나 서울대 의대 간첩단 사건에 연루됐던 서광태 씨도 여기 출신이다. 제법 장사가 잘되던 이때 조 선생은 가난한 대학생들과 예술가들을 음양으로 도왔다. 하지만 '고전음악의 집' 명성은 오래가진 못했다. 임대료 문제로 오동동을 떠난 뒤로 장사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잠시 장사를 접었다가 1990년 지금 자리에 '만초집'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마산원도심 자체가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11년 마산원도심 재생사업이 한창일 때 반짝 주목을 받는 듯했지만 두 분 어르신의 건강이 어려워지면서 부득이하게 올 10월 폐점을 앞두고 있다.

하루에도 수많은 가게가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는 시대에 '만초집'의 퇴장은 자연스러운 현상 중의 하나다. 그러나 자연현상 중에도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다. 지금도 적지않은 마산 사람들이 사랑하는 공간이라면 특히 그렇다. '만초집'은 단순히 오래된 곳이 아니라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희로애락을 같이한 존재다. 현역 선술집 '만초집'만큼 많은 스토리와 인물을 품은 공간이 우리 지역에 또 어디 있을까? 이 정도라면 우리 지역의 문화 자원이라고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만약 '만초집'이 문화자원이란 사실에 동의한다면, 이곳이 사라지는 걸 속절없이 지켜보기만 해야 할까? 지금의 '만초집'은 사라지더라도 새로운 '만초집'이 이어지게 할 순 없을까? 이런 상상은 어떨까? 경남개발공사 같은 공공기관이 '만초집' 상표를 적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인수하면 어떨까? 그렇게 인수한 '만초집' 상표를 공개된 창업시장에 내놓고 청년 창업가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로 쟁탈전을 벌여보면 어떨까? '만초집'에 축적된 문화에너지와 청년 사업가들의 신선한 아이디어가 만나면 흥미로운 결과물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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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축적되고 연결될 때 힘을 발휘한다. '만초집'도 그렇게 이어서 오래도록 우리 모두의 문화 브랜드로 성장시켜보면 어떨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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