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만남 서로 백지상태여야 가능
내 가정 내 이웃 추스르는 6·25 되길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을 넘어서기는 했지만 그러나 아직도 넘어야 할 산들이 많아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각국의 정상들만이 아니라 온 국민과 여러 나라가 화답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좋은 일들을 기대한다 하더라도 이변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남북 정상뿐만 아니라 세계의 정상들과의 회담이 줄줄이 이어질 텐데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회담은 회담이지 회담이 평화일 수는 없습니다. 회담에는 수 싸움, 기 싸움이 난무할 수 있어도 평화는 머리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잔머리나 강압이 아니라 아무런 전제가 없이도 힘이나 부나 정보 등 모든 것을 스스로 내려놓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진 놈이 더하다는 옛말처럼 서로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려고 한다면 거기에는 거짓 평화는 있을지 몰라도 참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참 평화는 시작도 과정도 그리고 마무리도 평화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평화 자체가 온전하고, 전체적이고,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화는 어제나 내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으뜸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것은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씀이고, 용서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용서하지 못하고, 왜 용서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모든 것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것을 기억조차 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모든 것을 잊고, 모든 흔적들을 말끔히 지워야 합니다. 새로운 만남이란 서로 백지상태이기 때문에 설렘이 있고, 기다림이 있고,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안절부절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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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회담을 비롯하여 세기적인 회담을 열 천 번 한다 하더라도 용서 없이는 화해가 없고, 용서 없이는 평화도 없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의 시작은 회담이 아니라 용서이고, 회담의 열매가 평화가 아니라 용서의 열매가 평화입니다. 이제 며칠 후면 6·25를 맞게 될 텐데 이번 6·25는 다른 어떤 6·25보다 의미가 새롭습니다. 이제까지는 '상기하자 6·25', '때려잡자 공산당'이라는 구호에 짓눌려 있었지만 올해만큼이라도 용서라는 문제를 가지고 신음할 수 있기를 바라고, 남북의 화해를 이야기하면서 내 가정과 내 이웃의 평화를 덮어 둔다는 것은 사람은 물론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기 때문에 먼저 내 가정, 내 이웃을 추스르는 6·25가 되기를 바랍니다. 평화를 위해 먼 길을 갈 필요가 없습니다. 가까이에서라도 잊으려 한다면 거기에서 평화가 시작될 것이고, 멀리에서도 또 다른 평화의 물결이 여울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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