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한 서점 주인장, '읽는 약' 처방
잘난 입으로 하는 정치행태 사라져야

입을 버려야만 갈 수 있는 시간과 세계가 있다. 망자들의 세계는 물론 망한 자들의 시간이나 세계 또한 그렇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세계, 죽은 듯 살아가야 할 이 세계에서 '입'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나 없는' 시간과 공간을 걷는 '발'로 변한다. 어떤 침묵은 그렇게, 어쩌면 죽음보다 더 가혹하게 만들어진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입이 없음'으로 발화되는 '애절함'이다. 이를테면 침묵은 나 혹은 어떤 죽음에 귀를 기울이며 듣는 인간의 마지막 소리다. 내 목소리가 없는 세계, 이 세계에서 나는 우두커니 나를 듣고 읽을 뿐이다. 모든 인간에게 고독, 보다 구체적으로 '읽는 약'이 필요한 까닭이다.

경주에 가면 '어서어서'라는 간판을 내건 작은 서점이 있다. 서점 주인장의 말에 따르면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나 없는' 서점이란 뜻이다. 아주 작은 서점이지만 아주 귀한 서점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서점 주인장의 진지한 태도와 책을 넣어주는 봉투 때문이다. 이름이 뭐예요? 책을 산 손님에게 한의원을 찾은 환자를 대하듯 서점 주인은 한의사처럼 근엄한 자세로 묻는다. 그리고 시집 한 권을 달랑 넣어주는 누런 봉투에 이름을 적은 후 내미는데 봉투엔 이렇게 적혀 있다. '읽는 약'(1일 회 일분, 취침 전·후 시분, 매 시간마다 읽기). 잘 모르긴 해도, 이 젊은 서점 주인장은 이즈음 인간에게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게 '고독'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6·13 지방선거에서 역대 최악의 패배를 기록한 자유한국당이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의 심정은 아마도 이중적이었을 것이다. 무엇을 잘못한 줄이나 알까 하는 연민 어린 조바심과 이번엔 정말 진정성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엇갈렸을 것이다. TV 앞에 있던 나는 고독이란, 인간의 아주 추상적인 말을 생각해냈고 경주의 작은 서점에서 파는 '읽는 약'을 떠올렸다. 알기 쉽게 "저희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이 한사코 믿기지 않았단 얘기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참 가관이다. 역대 최악이란 6·13 지방선거 참패 성적표를 받아들고 국민 앞에 무릎을 꿇었던 자유한국당이 홍준표 전 대표의 '마지막 막말'에 다시 술렁이고 있다. 이에 원내대변인은 "죄송합니다라는 말도 부끄럽다. 국민 여러분 다시 태어나겠다"고 읍소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국민은 제발, 다시 안 태어나는 게 약이라고 말리고 싶지는 않았을까. '고맙게도'(?) 홍준표 전 대표는 자신의 마지막 막말을 통해 '읽는 약'을 먹어야 할 대표적인 인간들을 대충 모아놓았다. #고관대작 지내고 국회의원을 아르바이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 #추한 사생활로 더 이상 정계에 둘 수 없는 사람 #국비로 세계일주가 꿈인 사람 #카멜레온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변색하는 사람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사이코패스 같은 사람 #이미지 좋은 초선으로 가장하지만 밤에는 친박에 붙어서 앞잡이 노릇 하는 사람 등. 여기에다 이완구, 황교안, 김무성, 김태호, 정우택, 원유철, 정진석, 나경원 의원 등 자유한국당 차기 당대표로 거론되고 있는 인물들만 더하면 보다 구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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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우리는 이 나라 정치와 역사에 해박할 필요는 없다. 이 '역대급 철판'들의 잘난 입으로 작동하는 정치가 다시 고개를 쳐드는 한 시대교체나 세대교체 따위의 말은 어불성설이란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이른바 보수가 궤멸했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불량식품보다 더한 인물들을 정치판에 대량 유통해 국민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던 한 시대가 끝장났다는 뜻이다. 지금 이 나라 정치판 구석구석에 '읽는 약'이 필요한 분들이 참 많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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