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경남도민일보 공동기획 하천과 문화] (3) 곽재우 장군과 정암강·기음강
곽재우 기강나루서 첫 승리
정암진'대첩'으로 희망 안겨
지역민, 정암루 만들어 기억
광탄·정암강·풍탄·기음강
남강 이름 지역마다 달라져
주변 풍경·물 흐름 등 영향

◇지역 따라 바뀌는 강 이름

물줄기의 이름이 지역마다 달라지는 시절이 있었다. 남강도 그랬다. 경호강과 덕천강 두 물이 합해지면 광탄(廣灘)이 되었다. 토종말로는 너우내가 된다. 지금 남강댐으로 수몰된 진주시 판문·귀곡동 일대가 합수지점이었다. 광탄을 지나면서 이름이 남강(南江)으로 바뀌는데 진주성을 남쪽으로 휘돌아 흐르기 때문이었다. 진주를 지난 남강은 함안과 의령을 남북으로 가른다. 그렇게 20리쯤 흐르면 솥바위나루=정암진(鼎巖津)에 이른다. 의령의 관문인데 1935년 정암철교 준공 이전에는 배편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솥바위=정암은 중요한 지표였다. 의령뿐 아니라 함안의 나루터 마을도 이름이 모두 정암이다. 남강에서 정암강으로 바뀌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함안 법수면 주물리와 의령 정곡면 백곡리 사이에서는 풍탄(楓灘)이 된다. 풍탄 여울에는 의령과 함안을 잇는 중요한 나루가 있었다. 여기서부터 동쪽의 함안천과 남강 합류 지점에서 10리는 저습지였다. 나루를 두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지금은 바로 옆에 백곡교 때문에 쓸모를 잃었다. 백곡교가 가설된 1995년 이전에는 시외버스를 비롯한 자동차조차 풍탄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지금도 그 자취가 양쪽에 남아 있다.

남강이 함안천과 합해진 뒤 조금더 가면 기음강(岐音江)으로 바뀐다. 낙동강과 합류하는 언저리라 하겠다. 기음강이 어디서 연유되었는지는 얘기가 엇갈린다. 물줄기가 둘로 갈라지는(岐) 모양이라 그렇다는 얘기가 하나다. 다른 하나는 흘러온 풀과 나뭇잎 따위가 여기 고이게 되어 거름강이라 했는데 이를 한자에서 뜻과 소리를 빌려 기음강이라 적게 되었다는 얘기다. 남강 흐름이 낙동강 본류에 막히는 바람에 느려지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의령 솥바위. 솥바위(정암)는 배편이 유일한 교통수단이던 예전부터 중요한 지표였다.

◇백성에게 희망 준 곽재우의 승전

정암강과 기음강은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의 강이다. 왜군은 1592년 4월 13일 대마도를 떠나 조선 침략에 나섰다. 당일로 부산진성 동래성을 깨친 다음 파죽지세로 20일만인 5월 2일 서울을 점령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곽재우는 4월 22일 처음 의병을 꾸려 5월 4일과 6일 기강나루에서 첫 승리를 일구었다. 일대 물밑 바닥에 나무막대를 박아넣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왜선들이 거기 걸려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활을 쏘아 물리쳤다.

육전과 해전, 관군과 의병을 통틀어 첫 승전이었다. 작은 승리였지만 5월 7일 이순신 장군의 최초 승전 옥포해전과 더불어 조선 백성들 마음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때까지 왜적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공포 그 자체였다. 걸리기만 하면 뼈도 못 추리고 결딴나는 왜적이었다. 곽재우는 우리도 싸워 이길 수 있음을 이 전투에서 입증했다. 추풍낙엽처럼 흩어지기만 하던 백성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실제 곽재우조차 기강나루전투 이전에는 의병 모집이 퍽 어려웠다.

정암진전투는 한 달 뒤인 6월 초에 벌어졌다. 함안을 점령한 왜군은 강을 건너 의령으로 오기 위한 표지로 막대기를 줄줄이 꽂아두었다. 늪에 빠지지 않고 평탄한 땅을 밟을 수 있도록 하는 길잡이였다. 이를 곽재우 의병이 흩어버리고 위험한 지역으로 들도록 바꾸었다. 왜군이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의병들은 조총 사거리 바깥을 유지하면서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의병이 무찌른 왜군은 2000명 규모였다. 의령 사람들은 이를 두고 단순히 전투라 하지 않고 대첩이라고 한다.

콘크리트 흔적이 남아 있는 풍탄나루 뒤로 백곡교가 보인다. 백곡교가 가설된 1995년 이전에는 시외버스를 비롯한 자동차조차 풍탄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곽재우 장군 관련 가장 오래된 기념물은 지정면 성산리 기강나루 들어가는 언덕에 있다. 앞면에 '有明朝鮮國紅衣將軍忠翼公郭先生報德不忘碑(유명조선국홍의장군충익공곽선생보덕불망비)'라 적혀 있어 보덕(불망)비가 되었다. 공덕을 갚고 또 잊지 않겠다는 임금의 다짐이다. 옛날 사람들은 요즘 사람들과 달리 정암진전투보다 기강나루전투를 더 크게 쳤나 보다. 첫 승전이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마음속에 피어난 희망이었던 것이다.

앞에서 뒤로 돌아가면 곽재우의 행적을 적은 글씨가 빽빽하다. 왼쪽면을 보면 곽재우와 함께 싸운 열일곱 장수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면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 채제공이 비문을 짓고 김해 선비 배동건이 써서 정조 9년(1785년) 을사년 3월에 빗돌을 세웠다고 적었다. 오위도총관은 오늘날 육군참모총장 되겠다.

솥바위 옆에 있는 의령 정암루. 일제강점기인 1935년 지역 사람들이 곽재우의 정암진대첩을 기리자는 목적으로 지었다.

◇박정희 곽재우장군유적정화사업

솥바위는 주변 멋진 풍경과 더불어 의령의 상징이 되었다. 옆에는 정암루도 있는데 일제강점기인 1935년 지역 사람들이 정암진대첩을 기리자는 목적으로 지었다. 한국전쟁 때 앞에 있는 정암철교와 함께 부서졌다가 1963년 새로 지어졌다. 여기 걸린 중수기를 보면 "1978년 곽재우장군유적정화사업이 박정희대통령각하의 분부로 시행됨에 따라 다시 중수하여 그 모습을 새롭게 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분부'는 충익사에서 가장 크게 실현되었다. 정암에서 의령천을 따라 읍내로 들어가면 바로 만날 수 있다. 입구 의병탑의 글씨는 박정희 본인의 것이다. 경내에는 1978년 12월 22일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가 기념식수한 눈잣나무도 한 그루 있다. 당시 군수 정계수는 각하의 분부를 지나치게 충실히 수행했나 보다. 의령 곳곳에 있던 멋진 노거수를 여럿 끌어모았다. 경내 조경수 가운데는 500살 넘은 모과나무와 멋진 배롱나무 살구나무가 있고 바깥쪽 외삼문과 홍살문 사이에도 300살은 넘었지 싶은 커다란 뽕나무가 심겨 있다. 독재자와 아부꾼이 모두 사라진 지금 누구도 그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곽재우 장군과 멋진 나무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보덕각 쌍절각 표지석. '박정희 대통령 각하 분부로 시행된 사업'임을 새겨놓았다.


주관 :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문의 : 환경교육팀 055-533-9540, gref2008@hanmail.net

수행 : 경남도민일보

의령 충익사 앞 모과나무. 경내 조경수 가운데는 500살 넘은 이 모과나무를 비롯한 멋진 노거수가 남아 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