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그 골목에 갔다] (9) 마산 위판장·복국 골목
새해 초매식 때 기관장들 모여 삼국시대부터 마산의 '포구'기능
방재언덕에 자리 내주고 후퇴 오동동 복국골목과 동고동락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 수협위판장은 마산의 아침을 여는 곳이다.

새벽 6시면 어김없이 경매사가 어느 한쪽 우뚝한 곳에 서서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 && ÆÆÐÐ"

그걸 기막히게 알아듣는 반대편 중도매인들.

그들은 손가락을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다섯 개까지, 위로 아래로 활발하게 움직였다. 나에겐 역시 알 수 없는 신호였다. 하지만 경매사들은 또 그걸 기막히게 접수하고는 경매를 마무리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산수협위판장./이일균 기자

생물 그대로의 활어, 냉동을 거친 선어가 그렇게 중도매인에게 넘겨졌다. 고깃값만 하루 몇 억 원어치 이상이었다.

창원으로 통합되기 전 마산의 한 해 시작은 언제나 이곳 위판장의 초매식이었다. 마산시장은 언제나 이곳에서 한 해 시작을 선언했다. 지금 통합 창원시에도 그 전통은 일부 남아 있다.

◇마산의 아침, 마산의 시작

더듬어보면 마산이라는 도시를 형성시킨 근원도 '마산포'였다.

고려 성종 때인 900년대 석두창의 기록을 보면 전국 12조창 중 하나로 세공미의 수송을 마산포에서 담당했다. 그리고 그 위치가 현 산호동과 남성동 일대의 포구에 있었다고 기록됐다. 이는 조선 영조 때인 1760년 마산창의 설치로 연결된다. 석두창처럼 대동미의 수납과 운반을 맡았다. 지금은 마산합포구 창동 SC제일은행 자리다.

당시 이 자리 인근까지 바다였다는 이야기다. 이후 끝없이 반복돼온 마산만 매립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나는 2006년, 마산어시장 수협위판장 자리에서 경남도민일보 '골목과 사람' 기획을 시작했다.

옛 마산포를 열었던 곳, 2006년 당시 마산을 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2009년 마산수협위판장에서 열린 초매식에서 경매사가 특유의 손짓과 말투로 물메기 경매를 진행하고 있다./이일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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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이 지난 지금,

위판장은 방재언덕에 자리를 내주고 뒤로 물러섰다.

횟집거리도, 장어집거리도 똑같이 물러섰다. 2004년 태풍 매미의 치명적 습격은 바다 지도를 바꾸는 것으로 지금까지 흔적을 남겼다.

지금 위판장 위치는 방재언덕 끄트머리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운영되는 '임시위판장'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하긴, 어시장 위판장은 어판장도 이전부터 온전히 제 자리는 아니었다.

팔자가 기구해 거의 10년 20년 단위로 자리를 옮겼다. 매립하면 앞으로, 또 매립하면 그 앞으로 옮기기를 50년 이상 계속해왔다.

위판장은 그렇게 옮기고 또 옮기면서 더 끈질겨졌다. 삼국시대 '골포'에서부터 1000년이 넘는 마산의 포구기능을 상징했다.

한순간의 위상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없는 어판장의 기능.

12년 전, 중매인 경력 50년의 현역 서양수(당시 75세) 중도매인이 그래서 말했다.

"살다보면 잘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소. 잘하는 사람, 못하는 사람 생길 수밖에 없지…."

중도매인 50년의 역사가 그를 달관하게 했을까?

생의 경륜이 그의 욕심을 비웠던 것일까?

이제는 은퇴해 팔순 중반인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달관의 여운은 10년 세월을 넘어 지금도 남아있다.

◇경매 뒤 손님 끓었던 복국집

마산 위판장과 운명을 같이해온 곳이 복국골목이다. 수협 위판장에서 오동동 아구찜골목으로 이어지는 해안대로 변에 40~50집이 집중돼 있다.

예전 이곳 복집은 24시간 영업을 했다. 위판장 중도매인처럼 이른 아침 식사를 원하는 사람들부터 손님이 주로 찾는 점심·저녁 시간, 심지어 2차·3차의 술자리 끝에 해장을 하려는 사람까지 하루를 꼬박 채웠다. 하지만, 지금은 심야영업을 하는 곳이 드물다.

복집골목의 위상을 12년 전 덕성복집 하익자(당시 64세) 대표가 전했었다.

"어떨 때에는 중·도매인들이 돈 뭉치를 그냥 두고 가고 그랬어예. 나중에 찾으러 와서는 만원짜리 몇장 건네주기도 했제. 참 돈이 흘러 넘치던 시절이었지"라고 했다. 80년대 이전 어시장 사정이 좋았을 때였다. 당시 어판장 연 매출이 1000억 원을 넘었다니 당시의 경제력을 그대로 전하는 말이다.

또 다른 업주는 "밤 12시부터 오동동에서, 어시장에서 새벽까지 손님이 안 끊기고 왔다 아입니꺼. 말도 마이소, 술 취한 사람들이 좁은 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으이 싸움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주방 입구에 그릇 담은 접시는 하루도 남아나는 날이 없었어예"라고 전했었다.

마산어시장 복국골목./이일균 기자

이곳 자타공인 큰형님은 '남성복집'.

김승길(현 79세) 사장은 10년 전 "어머니가 1962년에 경남도청에서 복어를 다루는 특수식품자격증을 따셨다. 마산에서는 딱 두 분이었다. 그런데 이게 1984년부터 복어조리기능사로 대체되면서 수준이 낮아졌다. 우리집에서 몇 달 일하고는 여기서 저기서 복집을 차리기 시작했다"면서 혀를 끌끌 찼었다.

요즘도 식당 맨 안쪽 TV 앞자리를 사무실 책상처럼 삼고 있는 그는 기자가 사진을 찍으려던 날 하필 자리를 비웠다.

"목욕 갔다가 2층서 쉬고 계신다"는 게 부인 김숙자(75) 씨의 설명.

"정확하게 언제 시작하셨어예?"

"왜정 때 시작했지예."

"복국 한 그릇 주이소~"

"까지복(1만 5000원)이제?"

"아니예. 8000원짜리예!"

"중국산인데?"

"그걸로 주이소 그냥~"

중국산 '은복'을 우려낸 국이 나왔다.

2006년 3월 4일 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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