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시기 문신 임제의 한문소설
나랏일 분탕친 두 전직 대통령 보는듯

푸른 강물 굽이치는 절벽 저녁 햇살 붉은 누각에서 시회를 열던 갓쟁이들이 삿대질로 고성이 왁자하다. 명나라에 사대하는 예법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나 보다. 젊은 선비 하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강물에 귀를 씻고 비틀거리며 말에 오르는데 취했는지 신발이 짝짝이다. 말고삐를 잡고 있던 돌쇠 녀석이 제 짝을 찾아오니 "네 눈이 저기 떠드는 갓쟁이보다 밝구나. 저놈들은 제자리에서만 보고 앉았으니 동인은 내가 가죽신을 신은 줄로만 알 것이고 서인은 나막신을 신었다 하여 짝짝이를 보지 못하니 어찌 한심하지 않느냐!" 이 젊은 선비는 관직에 나가 평안도 도사를 제수받았다. 풍류객이기도 한 그가 부임지로 가는 길에 개성을 지나다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술과 음식을 차리고 관복 차림으로 절을 하며 시를 읊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었는가.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이 일로 반상의 유별을 시시콜콜 따지는 조정에서 천한 기생을 양반이 추모하였다 하여 비난을 받았다. 국어 시간에 많이 외웠던 이 시조의 작자인 젊은 선비는 선조 때의 문신 백호 임제(白湖 林悌) 선생이다. 그는 나주 사람으로 성정이 호방하고 무리에 들지 않아 자유분방하였다. 조선의 로맨티스트로 황진이를 추도한 일 외에도 "북천이 맑다거늘 우장 없이 길을 나니…"에 "어이 얼어 자리 므스일 얼어 자리…"로 대꾸하는 평양 기생 '한우(寒雨)'와의 연시 화답도 귀에 익다.

그는 그 시대 현실을 냉철하게 비판하였으며 자주의식이 뚜렷한 선비이기도 하였다. 위로는 부덕하거나 무능한 군주를 질책하고 아래로는 부패한 관료들을 비판하는 한문소설을 많이 썼는데 그 중 <서옥설>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수작이다. 간사한 늙은 쥐가 저와 같은 무리를 이끌고 나라 창고의 벽을 뚫고 들어가 10년 동안 쌀을 모두 먹어치우고 분탕을 쳐서 쑥대밭을 만들었다. 이에 노한 창고신이 신병을 동원하여 늙은 쥐를 잡아다가 그 죄를 물어 재판을 열었다. 그러나 간사한 쥐는 뉘우치기는커녕 죄를 남에게 뒤집어씌우고 빠져나가려 발버둥친다. 복사꽃과 실버들을 비롯해 86종이나 끌어대며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항변한다. 심지어 모기와 파리, 하루살이까지도 등장한다. 끌려온 증인들이 모두 무고함을 고하여 궁지에 몰리자 상제의 지시로 창고를 털었다고 한다. 이에 창고신이 상제에게 고하여 결국 늙은 쥐는 처벌받아 죽게 되는데 작자는 태사씨의 말을 빌려 소설을 끝맺는다. "불은 당장에 꺼버리지 아니하면 번지는 법이요, 옥사는 결단성이 없이 우유부단하면 번거로워지는 법이다. 만일 창고신이 늙은 쥐의 죄상을 밝게 조사하여 재빨리 처리하였더라면 그 화는 반드시 그렇게까지는 범람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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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가까이 나라 가운데 들어앉아 나랏일을 분탕 치고 뇌물을 받아 제 배 속을 채우던 두 전직 대통령이 촛불 든 백성에게 붙들려 재판을 받고 있다. 이들도 간사한 늙은 쥐와 다름 없이 제 죄를 인정하지 않고 남에게 뒤집어씌운다. 옛사람의 탄식처럼 오래 끌다간 그 화가 나랏일에 미칠지도 모르니 빠르고 엄하게 처벌함이 좋을 것이다. 지금도 그들을 따르던 무리는 짝짝이를 신은 나라가 온전한 제 켤레를 찾아 신으려 하는데 제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온전하다 우기고 있다. 서른아홉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임제 선생이 임종을 앞두고 슬피 우는 식구에게 곡하지 말라는 물곡사(勿哭辭)라는 유언을 남긴다. "세상 모든 오랑캐들이 저마다 황제라 칭하건만 유독 조선만이 기어들어가 중국을 주인으로 섬기는구나. 내 이런 나라에 살아 있은들 무엇 하며 죽은들 무엇이 아까우랴. 곡하지 말라." 때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고명을 받던 조선시대다. 이 얼마나 서릿발 같은 유언인가. 친일 친미로 빌붙어 사대하며 통일의 초석을 놓는 일에 어깃장을 놓고 제 살 뜯어 먹는 공개서한이나 보내는 무리는 선생의 유언을 되새기고 쥐구멍에 들어 그 부끄러운 얼굴을 감추라.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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