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대궐 사람들] (5) 사미루 구문정의 추억
김영규 증손자 김종하 가족 1974년부터 27년 동안 살아 나무·꽃 많고 우물도 있어
김영규 손자 김기상·구인회 친분 두터워 요양차 있기도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조각가 김종영 생가 주변에는 옥산(玉山)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이나 상점이 몇 있다. 옥산 또는 옥봉(玉峰)은 김종영 생가를 포함한 소답동 기와집들의 뒷산이었다. 현재 소답초등학교 뒤편으로 이어진 백옥산(白玉山)을 이른다.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낼 정도로 예로부터 중요하게 여기던 산이었다. 이원수 선생이 말하는 꽃대궐은 창원읍성 동문에서 바라본 풍경, 다시 말해 옥산 자락에 걸친 기와집들, 그 아래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소박한 소답리 마을 전체였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마을 소답리

"봄이 오면 앞들 파란 보리밭에 산비둘기 날아와 놀고, 저 멀리 남산에 연분홍 복사꽃이 필 때는 뒷산 절벽에 진달래도 붉은 꽃물을 마을 앞 냇가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냇가에는 수백 년 갯버들이 파란 가지를 너울거렸고, 여름이면 천 년을 물에 씻긴 바위틈새에서 미역 감고 가재 잡고 고목 나무 그늘 아래는 농부들 멍석 깔아 낮잠 자고 동네 사람 모여 놀던 휴식처였다."- 이원수문학관 소식지 <꽃대궐> 2013년 2월호 중

1970년대 중반 구문정. /김세욱

운경 김종두(81·창원시) 시인이 묘사한 어릴 적 소답리 풍경이다. 그는 꽃대궐 기와집 풍경을 만든 모연 김영규의 증손자다. 지금의 김종영 생가는 그의 큰집이다.

"제사 같은 큰일이 있으면 큰집에 다 모였지. 집안 아이들도 다 큰집 가서 놀고, 때 되면 밥도 그냥 거기서 먹기도 하고 그렇게 자랐어."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 초반까지 김종영 생가에서 살기도 했다. 서울대 교수로 있던 6촌 형 김종영 선생이 집을 비워 둘 수 없다며 부탁한 것이었다.

"대문 앞에 큰 느티나무가 있잖아. 가을에 낙엽이 지면 마당을 쓰는데, 아침 일찍 미숫가루 한 그릇을 타 먹고 시작해야 할 정도로 마당이 넓었지. 구획정리 되기 전에는 집 뒤가 울창한 숲이었어. 대나무도 많았고."

1974년에는 김영규의 또 다른 증손자 김종하(1936~2002)의 가족들이 별채인 구문정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아들 둘과 아내를 포함한 식구 4명이 2001년까지 27년을 지냈다.

"사미루 앞으로 뒷산 옥봉에서 흘러내려 본채 대문을 지나는 큰 개울이 마을 어귀 연못까지 이어졌어요. 개울가에 수양버들이 여러 그루 있어 그늘이 되었고요. 문중에서 동네 앞에 공동 우물을 뚫어 마을 사람들이 쓰도록 했어요. 본채의 대문 앞 느티나무 아래는 마을 빨래터였어요. 동네 아낙들이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던 게 생각나네요."

김종하의 두 아들 세극(51·창원시), 세욱(49·사천시) 형제가 추억하는 1970~80년대 소답동 풍경이다.

1970년대 후반 구문정에 살던 김종하 씨 가족. / 김세욱

◇사미루 구문정 옛 풍경

구문정은 원래 손님을 대접하고 모임을 열던 장소였기에 마당도 바위와 나무가 어우러진 아담하고 예쁜 정원으로 꾸몄다. 이후 세극·세욱 형제가 살 때도 온갖 화초가 자랐다.

"마당에서 구문정을 볼 때 왼쪽에 200여 년 된 향나무가 있었고, 지금도 있는 바위 구석에 또 그만큼 오래된 단풍나무가 있었어요. 1990년대 초에 다 죽어버렸지요. 마당 구석구석 진달래, 매화, 맨드라미, 달리아, 봉선화 등이 피고, 단풍나무를 따라 담벼락에 앵두나무도 한 아름이었습니다."

현재 마당 양쪽으로 비파나무가 두 그루 크게 자랐다. 놀랍게도 형제가 비파 열매를 먹고 버린 씨앗이 큰 것이라 한다.

"원래 마당 앞 담벼락에 자라던 게 있어요. 고조부가 진남군수로 있을 때 가져와 본채와 별채에 심은 거라더군요. 그 열매를 우리 식구가 먹고 버린 씨앗이 자라서 축담에도 비파나무가 자랐어요. 비파는 온대성 과일이라 창원의 기후와 썩 맞지 않는데,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네요."

구문정 가운데 큰 비파나무 두 그루가 보인다./이서후 기자

마당에는 우물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물이 마르고 없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한여름에도 시원한 수박을 내주던 우물이었어요. 그런데 소답동이 개발되고 여기저기 지하수를 개발하니 말라버리더라고요."

정원 같은 마당에서 두 형제는 야구를 하며 놀곤 했다. 마당에서는 간간이 엽전(상평통보)이 나오기도 했다. 마루에 앉으면 천주산이 훤하고, 창원읍성 동문 터 주변으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도 다 보였다.

특히 대문채인 사미루는 당시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누각에 오르면 온 동네가 보이는데 경치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가족 사진을 찍은 계단에 다시 선 김세극 김세욱 형제. /이서후 기자

◇구문정을 스쳐간 인연

형제가 듣기로는 한국전쟁 시기 구문정은 사단 특무대 사무실로 쓰인 적이 있다고 한다. 이후에는 잠시 수녀원으로 이용된 적도 있다. 그리고 조금은 특별한 인연이 이곳에 머물기도 한 것 같다. LG그룹 창업주 연암 구인회(1907~ 1969)가 요양차 머물렀다는 믿을만한 증언이 있다. 바로 세극·세욱 형제의 진외종조부(할머니의 남동생) 최주천(86) 박사의 회고다. 최 박사는 우리나라 미국 유학 1세대다.

"내가 미국 유학 갈 때(1957년) 자형 친구인 LG 창립자가 자형 처남인 나를 서울 대궐 같은 한국식 집에서 도미 유학 성찬대접을 받았는데…. (중략) 어지간한 친구가 아니면 자기 친구 처남 유학 가는 길 축하 파티를 하지 않는다. 그전에 LG 창립자가 창원 꽃대궐에 한 2, 3개월 계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그 집은 LG 창립자가 머문 꽃대궐이다. LG 후손들은 모를 것이다."

이는 김세욱 씨와 최 박사가 주고받은 이메일 내용이다. 형제의 조부 김기상(김영규의 손자)과 구인회가 처남 미국 유학을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던 것 같다. 그러니 구인회가 김종영 생가 별채에 잠시 묵었다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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