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강 이형규 선생을 그리워하며

김한순(63) 마산제일여자중·고등학교 동창회장은 청강 이형규 선생을 '우리 할배'라고 불렀다. 청강 선생은 지난 4월 30일 오전, 향년 94세로 타계했다. 청강 선생은 학교법인 문화교육원 설립자다. 문화교육원은 마산대, 마산제일고, 마산제일여고, 마산제일여중 등을 산하에 둔 지역 명문 사학이다. 지난 5월 10일은 문화교육원 설립 71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날이었다. 이날 마산제일여고에서 만난 김 회장은 여전히 '할배'를 그리워했다.

늘 겸손 또 겸손 강조

김 회장은 마산제일여중 재학시절 학생회 간부를 했다. 그때부터 청강 선생과 인연이 시작됐다. 김 회장이 청강 선생 곁에서 지낸 38년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옷을 잘(화려하게) 입지 마라', '말을 조심해라', '검소해야 한다', '사람들 뒤에 있어야 한다' 등이었다.

겸손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문화교육원이 산하에 4개 학교를 두고 있어, 청강 선생 자신과 김 회장이 조신하게 처신할 것을 당부한 것이다. 김 회장은 청강 선생과 배두이 여사를 모시고 어딘가를 갈 때도 누군가 인사를 하러 다가오면 뒤로 물러서거나 멀찌감치 떨어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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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법인 문화교육원 설립자 청강 이형규.

"유독 저한테만 인색하다고 느껴진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돌이켜보면 모두 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뿐만이 아니에요.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문화교육원 직원 20여 명이 한자리에 앉아서 할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모두 저마다 특별한 사랑을 받았었다며 한 가지씩 기억과 추억을 말했습니다. 한 신입 직원은 제일고 재학시절부터 인사를 잘했더니 자기를 유난히 기억하는 줄 알았다고 했어요. 지금 할배가 안 계시니 누구를 제일 사랑했느냐고 물어보고 싶다고 입을 모았었습니다."

함께 있다가도 누군가 다가오면 멀리 떨어지라고 한 것은 시기를 받을 수 있으리라 여긴 청강 선생의 배려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교만해 보이지 않도록 신경 썼다. 다만, 봉사활동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공부보다는 사람됨이 먼저

겸손은 청강 선생의 교육 철학이었다. 청강 선생은 한결같이 '선 질서, 후 학습'을 강조해왔다. 사람됨이 먼저고 이후에 교육이라는 뜻이다. 마산제일여고 정문에 새겨진 '오늘은 무엇을 얻고 가느냐'는 글귀도 같은 맥락이다.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한 예로, 김 회장 재학시절 마산제일여고는 수학여행 대신 캠핑을 떠났다. 다른 학교는 서울, 경주 등으로 이른바 볼거리에 집중했었다. 그러나 마산제일여고는 하동 개울가에서 텐트를 치고 직접 밥을 지어 먹는 하루를 보냈다.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교육을 원했던 청강 선생의 혜안이었다.

청강 선생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배움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평생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학교법인 문화교육원은 1947년 5월 10일 당시 경남 마산시 문화동 4번지에 '마산가정여학교'가 문을 열면서 첫발을 내디뎠다. 마산가정여학교는 현재 마산제일여중과 제일여고의 모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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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가정여학교 개교당시 교문(1947년).

마산가정여학교는 1950년 마산여자상업중학교로, 이듬해 8월 31일 마산제일여자중학교로 교명을 바꾼다. 마산제일여고는 1952년 10월 30일 설립 인가를 받고 1954년 3월 2일 제1회 졸업식이 열렸다. 1954년 4월 제일유치원도 문을 열었지만 1966년 부득이하게 폐원했다.

오늘날 마산대학교 전신인 마산간호고등기술학교는 1956년 5월 30일 인가를 받아 개교했다. 당시 마산시 중앙동 3가 3번지에서 교실 한 칸으로 시작했다. 첫해에 신입생 40명을 모집했고 1959년 2월 20일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마산간호고등기술학교는 1972년 12월 18일 폐교와 더불어 '마산간호전문학교'로 거듭난다. 마산간호전문학교는 1964년 제5회 간호원 국가시험 이래 1982년까지 100% 합격하는 전통을 이어간다. 이후 1979년 마산간호전문대학으로 개편했고 1983년 마산간호보건전문대학, 1992년 마산전문대학, 1998년 마산대학, 2011년 마산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한다. 1985년 3월 지금 자리에 캠퍼스를 조성했다. 마산대는 보건계열에서 전국에서 손꼽을 정도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청강고등학교는 1984년 12월 10일 설립인가를 받고 1985년 3월 5일 첫 입학식을 연다. 당시 학생 정원은 학급당 58명씩 모두 696명이었다. 이후 1997년 2월 20일 마산제일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지금까지 문화교육원 산하 학교 졸업생은 마산제일여중 2만 8157명, 마산제일여고 3만 8668명, 마산대 5만 3970명, 마산제일고 1만 936명 등 모두 13만 1731명이다.

청강 선생의 아들 이학우 이사장은 지난해 문화교육원 70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청강 선생은 질서와 예절이 빠진 공부는 가치가 없다고 했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됨됨이를 갖춘 뒤 학문을 깨쳐야 한다고 늘 강조해왔다. 그 결과 오늘날 문화교육원의 학교는 학부모가 안심하고 자녀를 맡길 수 있는 학교가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소탈하면서도 따뜻한 사람

4개 학교를 산하에 둔 문화교육원의 설립자. 청강 선생은 엄청난 부를 쌓았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는 5000원짜리 바지를 가장 아꼈던 사람이었다.

"할배가 어느 날 부림시장에서 5000원짜리 바지를 하나 사 오셨습니다. 그 바지가 바래져서 다림질을 하면 광택이 날 때까지 입으셨어요. 제가 며느리를 맞을 때 코코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춰 드린 적 있는데 아마 가장 비싼 옷이었을 겁니다. 교육으로 번 것은 교육에 모두 투자한다는 것이 철칙이었어요."

김 회장은 할배가 '꼼쟁이(구두쇠)'였다고 했다. 청강 선생은 가끔 골동품 가게를 찾는 취미가 있었는데, 집안에 한 번도 새 가구가 없었다고 했다. 지금 현재도 남이 쓰던 헌 자개가구와 목가구만이 있다고 했다. 김 회장은 "쌀 한 톨도 농부 손길이 88번이나 거쳐야 한다며 늘 남기지 않으셨고 젓갈 한 가지, 된장만 있으시면 식사를 하셨다"며 "육순 이후로는 판단이 흐려질까 봐 술을 일절 입에 대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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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가정여학교 제1회 졸업사진(1949년).

또 김 회장은 "셋째(이학은 고려대 교수) 아들이 하는 말이 '어렸을 때 한 번도 새 옷을 입어본 적이 없다. 큰 형, 둘째 형이 입고 난 옷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넷째가 물려받을 때가 되면 너무 심하게 닳기 때문에 새 옷을 사줘서 배가 아팠다'고 우스개로 말하곤 한다"고 했다. 아들 4명 교복을 한 번도 사 입힌 적 없이, 모두 시장에서 원단 쪼가리를 구해서 배두이 여사가 직접 만들어 입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청강 선생은 주변 사람을 알뜰히 챙기셨다. 학교에서 식사를 하실 때 식당 아주머니 한 분이라도 앉지 않으면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 6·25전쟁 중 부모 잃은 아이 둘을 거둬 뒷바라지를 했다. 김 회장은 이 중 한 명이 수도권 한 지역 일간지 편집국장을 지냈다고 했다. 또 청강 선생이 어린아이를 무척 좋아해 어떤 아이든 마주하게 되면 안아주고,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들어줬다고 했다.

청강 선생은 "내가 흙으로 돌아갈 뿐이니까 결코 거창하게 치르지 마라"는 말을 남겼지만, 삼일장으로 치른 장례식에는 사회 각계각층에서 애도하는 인사 2000여 명이 다녀갔다.

김 회장 "그리운 아버지"

김 회장은 마산제일여중 재학시절 학생회 간부였다. 당시 김 회장은 창원군(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에서 기차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당시 마산제일여중을 졸업하면 은행 등에 취직이 잘된다는 인식이 있었다. 재학시절 일주일간 생활관에 머물면서 예절을 배우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한 날은 청강 선생과 아침식사를 하는 날이었다.

"청강 선생이 먹는 밥에서 돌이 나왔었습니다. 교사, 직원 모두 기겁이 돼서 당황했는데 제가 다가가서 '조리기구에 구멍이 나서 실수로 돌이 하나 들어갔나 봅니다'라고 설명 드렸더니, 어린 녀석이 당황하지 않고 말을 또박또박 잘한다며 기억해줬습니다."

그때부터 김 회장과 청강 선생 인연이 시작됐다. 김 회장은 1974년 마산제일여고를 졸업 후 한 은행에 취직했다. 김 회장은 청강 선생이 "내 학교를 다니면서 반듯하게 키운 사람은 졸업하고 취업까지 책임져야 한다"며 각종 기관, 관공서, 기업을 찾아다니며 모두 취업에 도움을 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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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한순 문화교육원 신협 이사장. / 김구연 기자

1979년 어느 날, 문득 청강 선생은 김 회장이 일하던 은행을 찾아갔다. 청강 선생은 "너 결혼해야 하는데, 내가 좋은 배필을 이어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당시 같은 은행 직원을 좋아하고 있어 거절했다. 청강 선생은 "연애하고 있었냐"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후 김 회장의 현재 남편을 만나본 청강 선생은 무척 마음에 들어 하며 1980년 4월 27일 마산제일여고 강당에서 결혼식을 차려줬다. 그해 5월부터 김 회장은 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지금까지 38년 동안 청강 선생 옆을 지켰다.

청강 선생은 아흔이 넘어서도 매일 아침 8시 출근하고 오후 5시 퇴근했다. 학교에 가면 산책을 하며 쓰레기를 줍기도 하고, 연못가 산책을 하며 금붕어 먹이도 주고, 학생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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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지난해 12월께 감기 증세로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4개월간 투병하다 끝내 숨을 거두었다. 청강 선생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한 매체에는 "아침에 학교 갈 때마다 보셨던 분", "학교에서 산책하던 이사장 할아버지" 등 고인의 명복을 비는 마산제일여중·마산제일여고·마산제일고·마산대 졸업생의 댓글이 끊이지 않았다.

김 회장은 아직 '우리 할배'가 그립다. 그는 "청강 선생님이 지병은 없었는데, 아마도 지금까지 늘 온 힘을 다해 살아오시면서 말 그대로 운명을 다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달 할배가 '한순아, 너거 엄마(배두이 여사) 잘 부탁한다'고 했던 말이 아직 기억에 남는다. 추운 겨울 병원에서 보내고 봄을 맞았다. 매일 하루만 더 계셨으면 하는 바람이 이어졌다. 음력 5월 5일이 생신이신데, 그때까지만 계셨더라면"이라며 울음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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