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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소묘] (2) 사람을 쓴다는 것, 그 어려움에 대하여

나한거사(羅漢居士) webmaster@idomin.com 입력 : 2018-06-01 15:05:20 금     노출 : 2018-06-01 15:23:00 금

중국 과거제를 처음 본 서양인들은 공정하고도 정교한 관료 선발 시스템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영광에는 늘 그늘이 따라붙는 법. 문화 평론가 위치우이는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과거시험에 관한 전람회를 본 적이 있다. 진열된 여러 가지 실물을 구경하면서 문득 송대(宋代) 이후로 시험 부정행위와 이를 방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대책들이 마치 당시 응시자와 관리들 간의 지력(智力) 경쟁에 이르렀으며, 그 결과 양쪽이 모두 야비하고 비천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과거는 대단한 수재가 아닌 이상 평생 쏟아부을 정력을 모두 소모해도 합격하기 어려웠다. "각 고을마다 천 수백 명의 동생(童生·어린 학동)이 모여 그중 10여 명이 생원으로 선발되고, 각 성에서는 만 수천 명의 생원이 모여 백 수십 명이 거인으로 선발되며, 천하에서 모인 수천 명의 거인 가운데 백 수십 명이 진사로 선발된다." 량치차오가 청나라 말기에 한 말이다.

바늘구멍도 이런 바늘구멍이 없다. 위치우이가 말한 대로 부정행위가 갈수록 교묘해진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래서 각종 야사(野史)에는 원혼이 되어 떠도는 '낙방거사'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정신력을 모두 탕진한 때문인지, 야비하고 비천한 상태가 된 때문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과거 출신 중에서 위대한 정치가가 잘 나오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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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도 고려시대부터 과거 시험을 도입했다. 서울 경복궁에서는 해마다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예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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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도 고려시대부터 과거 시험을 도입했다. 서울 경복궁에서는 해마다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예문관

중국 왕조 시절 '연납(捐納)'이란 제도가 있었다. 돈을 내고 관직을 사는 '매관(買官)'을 일컫는다. 과거에 합격하여 고전에 대한 교양을 자랑으로 삼던 사대부들은 이 때문에 연납 경력을 가진 관리를 비천한 출신으로 여겨 상대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매관 출신자들은 자본을 투자하여 관료가 된 까닭에 대부분 임관 후 밑천을 뽑는 데 몰두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집안에 돈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관리봉급이나 부수입 같은 푼돈은 쳐다보지 않았다.

대장부로 태어나 큰일을 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과거 같은 번거로운 과정에 얽매이기는 싫은 부류다. 청나라 옹정제 때 명신(名臣)으로 이름을 남긴 리웨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열정으로 가득한 데다 부패가 들러붙을 여지가 없으니 과거나 일반 매관 출신자와 달리 혁혁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인재 등용문'인 과거는 득보다 실이 많은 시스템이었을까? 예외적인 리웨이 사례에서 보듯 과거제 시행 이후 비과거 출신이 정치적 역량을 발휘한 경우 또한 그렇게 많지 않다. 전체적으로는 과거가 중단됐을 때 오히려 부작용이 더 컸다.

이민족인 몽골이 중국을 지배했을 때다. 소박하고 강건한 몽골족이 중국을 지배했기에 행정이 간소화되고 번거로운 절차가 없어졌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원(元)나라만큼 관청 간 문서왕복이 번잡하고 시간을 허비한 시대는 없었다.

원나라 정부는 장기간에 걸쳐 과거를 시행하지 않았기에 진사(進仕)로 불리는 과거 출신 집단이 형성될 수 없었다. 원 정부는 그 대신 관청에서 실무 수련을 밟아 올라간 서리(胥吏)를 그대로 관원으로 등용해 일을 맡겼다.

과거 응시자들은 통상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현실과 동떨어진 유교 경전을 달달 외워야 했다. 그래서 뜻있는 이들은 과거 급제자를 향해 "무용(無用)한 학문을 공부했을 뿐"이라고 폄하했다. 하지만 '공론(空論)'을 공부했다고는 하나 진사는 그런대로 엘리트 의식에 근거한 결단력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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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송의 과거 시험.

이에 반해 단순히 경험뿐인 실무자 출신 서리는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해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회피하기 일쑤였다. 그 방법은 문서를 남발하며 상사의 의향을 엿보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부작용과 피해는 모조리 서민들이 감당해야 했다.

과거 제도가 도입되기 전에는 추천제가 관리 등용문이었다. 한대(漢代) '효렴'을 비롯한 공식 추천 시스템과 더불어 비공식적인 추천이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추천은 항상 '이해(利害)'가 개입되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도 추천자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을 추천하는 경우는 대뜸 부정한 청탁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특히 친인척을 그렇게 추천했다면 요즘 잣대로는 몰매 맞기 딱 알맞다.

춘추시대 진(晉)나라 사람 기해는 나이가 들어 군대 고위직을 사임했을 때 누구를 후임으로 하면 좋겠느냐는 군주의 물음에 서슴없이 자식인 기오를 추천했다.

그가 한 말을 들어보자. "신하의 결점을 아는 사람으로 군주만 한 이가 없고, 자식의 결점을 아는 사람으로 그 아비만 한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기오는 어려서 가르침을 잘 따르고, 박문강기(博聞强記·지식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남)한데다 태도 또한 도의(道義)가 아니면 바꾸지 않을 만큼 바릅니다. 기오로 하여금 군국대사를 처리하게 한다면 저를 뛰어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발언이다. 자식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추천하다니! 여기서 짚어볼 것은 기해가 어떤 사람이기에 이토록 당당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지공무사(至公無私·지극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음)한 사람이었다. 사심이 없었기에 그가 추천한 사람은 '아들'이 아니라 '적임자'였다. 아비가 말한 대로 기오는 과연 훌륭하게 그 직책을 수행했다.

당나라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 중에 적인걸이 있다. 적인걸은 현대중국 추리극에도 등장할 정도로 당나라 정치사에서 깊은 족적을 남긴 사람이다. 여황제 무측천 시절에 맹활약한 그는 같은 동료재상이었던 누사덕을 능력 없는 무골호인에 불과할 뿐이라며 평가절하했다.

누사덕을 경시하는 적인걸을 본 무측천이 어느 날 적인걸에게 물었다.

"누사덕은 현인인가? 그에게 사람 보는 안목이 있는가?"

"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대를 재상에 추천한 사람이 누사덕이니, 그가 사람 보는 안목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적인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이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사람이 누사덕이었다니!

한나라 학자 양진은 동래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창읍현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창읍현령으로 있던 왕밀은 양진이 예전에 천거한 친구였다. 왕밀은 이번 기회에 은혜를 갚고 싶어 했다. 밤에 양진을 만난 왕밀은 황금 10근을 선사했다.

그러나 양진은 "옛 친구인 나는 자네를 잘 아는데, 자네는 옛 친구인 나를 모르는구먼.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그 예물을 거절했다. 왕밀이 "밤이라 아는 사람이 없으니 받으면 어떤가?"라고 말하자 양진은 이렇게 답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가?"

'양진이 금을 거절했다'는, '양진거금(楊震拒金)'이란 사자성어는 여기서 나온 이야기다. 비록 예물을 거절당하긴 했지만 왕밀 또한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양진의 말에 감동을 받아 그 황금 10근으로 '사지당(四知堂)'이란 건물을 지어 자신과 세상 사람들을 경계하고자 했다. 사지란 하늘과 땅, 양진과 왕밀이 안다는 말이다.

누사덕과 양진이 던지는 메시지는 '인사추천이란 자고로 이래야 한다'는 원칙이다. 누사덕은 대가를 바라지 않은 것은 물론, 추천한 사실조차 다른 이에게 알려지는 걸 두려워했다. 양진은 누가 보지 않더라도 반대급부를 챙겨서는 안된다는 점을 증명했다.

사실 사서(史書)에는 이런 일화가 드문드문 수록돼 있다. 많지는 않지만 읽는 이들에게 경책(警策)을 가할 정도는 된다. 사서 편찬자들은 어떤 이유에서 이런 이야기를 수록했을까? 아름다운 행적을 후손들에게 남기기 위해서일까?

그렇지 않다. 실상은 대다수 관리들이 인사 청탁과 이에 따른 부패로 찌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형벌과 함께 끊임없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상기시킬 수밖에 없었다. 누사덕과 양진이 밝은 햇살 아래 서 있던 사람들이라면, 절대다수는 음습한 그늘에서 노닐던 이들이다.

청탁과의 경계가 모호하긴 해도, 추천이란 절차를 통하지 않고서는 인재를 판별하기 어렵다. 적임자 한 사람을 고르기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이를 독대해서 분별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고래로 동양사회에서는 사람을 잘 알아보는 것을 지식인의 책무로 여겼다. 먹물깨나 먹은 이라면 누구든지 인물 감식을 뇌까리고, 말을 잘 감별하던 중국 전국시대 사람 백락(伯樂)이 '지인(知人)'의 상징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당나라 명사 한유는 '잡설'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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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마도 백락을 만나야 세상에 알려진다(백락일고)는 고사성어로 유명한 백락. 재능 있는 사람도 그 재주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야 빛을 발한다는 뜻이다.

"천리마란 백락이 있고 난 후에 나타난다. 천리마는 늘 있지만 백락은 늘 있지 않다. 그래서 명마가 있을지라도 (백락을 만나지 못하면) 마구간에서 덜떨어진 말들과 나란히 죽게 된다. 내가 듣기로 나무가 산에 있고, 말이 시장에 있을 때 이들을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사람이 매일 수만 명이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재목이 안 된다거나 하품(下品) 말이라는 뜻은 아니다. 뛰어난 목공 석(石)이 지나가면서도 쳐다보지 않고, 백락이 보고서도 뒤돌아보지 않은 후에야 그것들이 동량의 재목이 아니고 준족을 지닌 말이 아님을 알게 된다. 전에 말장사가 시장에서 말이 팔리지 않자 백락이 말을 잘 감정한다는 걸 알고 따라가 도움을 청했다. 그리하여 백락이 한 번 돌아보자 말값이 세 배로 올랐다."

'관포지교(管鮑之交)' 로 유명한 포숙이 한때 상대 진영에 있던 관중을 추천한 사례가 그러하다. 비록 개인적 성취는 작다고 해도 포숙은 춘추시대 대정치가 관중을 천거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금도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인사추천이란 리더가 그 추천을 받아들일 때만 빛을 발한다. 아무리 좋은 인재를 천거하더라도 리더가 도량이 좁거나, 재능을 판별할 역량을 가지지 못하면 만사휴의다. 그런가 하면 인재를 쓰는 방식도 사람마다 다르기에 어떤 때는 성공이 어떤 때는 실패로 나타난다.

전국시대 4공자 중 한 사람인 맹상군은 '계명구도(鷄鳴狗盜)' 고사에서 알 수 있듯이 재주만 있다면 직종을 불문하고 다양한 인재를 포용했다.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맹상군은 천하에 명성을 날렸는가 하면 후에 볼모로 잡혀간 진(秦)나라를 탈출해 목숨을 건지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비루한 인물만 챙겼다며 후세 유학자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아야 했다.

조선 말을 호령하던 흥선대원군 또한 '천하장안(千河張安·대원군의 심복 네 사람)'과 같은 부류를 아끼고 신뢰했다. 구한말 유학자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대원군을 이렇게 평한다. "운현(雲峴·대원군이 살던 집, 여기서는 대원군을 칭함)은 사람을 기용할 때 두뇌 명석하고 일 처리가 재빠르며 대담한 발언을 잘 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고, 성격이 온화하고 노숙한 사람은 싫어하여 멀리했다. 그 결과 술 마시고 도박하는 무뢰배들이 온갖 수단과 모사를 동원하여 진출했다. 수염이 아름다운 자, 장구를 잘 치는 자, 해학에 능한 자들이 대부분 높은 벼슬을 얻었다. 그는 또한 각종 기예를 좋아하여 점술사들이 항상 좌우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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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전국시대 대정치가 관중은 포숙의 추천으로 그 재능을 떨칠 수 있었다. 관중과 포숙의 우정을 나타내는 '관포지교'라는 고사성어는 지금까지도 쓰인다.

대원군이 민정(民情)을 살피는데 '천하장안'을 비롯한 무뢰배(?)들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맞다. 안동 김씨 세도가들을 극도로 혐오한 그에게 온갖 기예를 지닌 하층민들은 눈과 귀를 보충해주는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성격 탓에 '치국의 방략'을 지닌 현사(賢士)들은 종종 그와 어울리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런 사람을 추천하더라도 대원군은 "기민하지 못하다"며 등용하지 않았다. 서세동점 격변기를 헤쳐 나가야할 당시 조선에서 이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인사는 만사"라고 했다. 사람을 잘 쓰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용인이 중요하다고 강조되는 것은 역으로 사람을 잘 쓰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드루킹 사건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 김경수 경남도지사 후보는 그쪽 사람들을 소개한 것이 추천이지, 청탁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추천이란 늘 청탁을 의심받는 행위라는 점이다.

역사를 통해 입증된 확실한 사실이 있기는 하다. 과거를 통해 뽑건, 추천을 받건 사람을 쓰는 일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저자 사마광은 "훼예(毁譽·비난과 칭찬)에 의거해 인재를 구하면 결국 애증이 개입되어 선악이 뒤섞일 수밖에 없고, 고과(考課·근무성적)에 근거하면 교사(巧詐·교묘한 수단으로 속이는 것)가 횡행해 진위가 불투명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성현들도 인사를 어렵게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참고도서

- 장펑, <자치통감을 읽다>, 378

- 구주모, <고전과 함께하는 수필 삼국지>, 채륜

- 신동준, <자치통감 삼국시대편>, 살림

- 미야자키 이치사다, <중국통사>, 서커스

- 위치우이, <천년의 정원>, 미래 M&B

- 진정, <중국과거문화사>, 동아시아

- 황현, <매천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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