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사람이다” 백정들, 단결하다

'불가촉 천민' 백정들

1894년 7월 30일 단행된 갑오개혁으로 조선은 공식적으로 신분제를 폐지했다. 공·사노비, 역인(역에 딸린 노비), 창우(극, 판소리 등을 하던 예능인), 피공(가죽으로 물건을 만드는 사람) 등 당시 천민대우를 받았던 이들에 대한 면천이 개혁안에 담겼다. 그런데 백정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1896년 9월에 제정된 '호구조사규칙'에 백정들도 일반인들과 같이 호적에 올릴 수 있게 됨으로써 백정들에 대한 신분 차별은 사라졌다. 그러나 1909년 제정된 민적법에 따라 백정들은 본적란에 '도한(屠漢)'이라고 붉은 글씨로 적어야 했다. 누구나 쉽게 백정임을 알 수 있었다.

1922년 일제는 조선호적령을 제정했다. 그러나 역시 본적란에 백정들을 '도한'이라고 적는 것은 여전했다. 백정들은 과거 같은 신분이었던 천민들에게조차 차별당하기 일쑤였다. 대표적인 예로 1922년 대구 일부 백정들이 야유회를 하면서 기생들을 데리고 갔다. 이에 일반민들이 기생들을 비난하자 기생 조합에서는 야유회에 참석한 기생들을 제명시킨 일이 있었다. 이 일 이후 형평사 행사를 할 때 기생들을 불러도 응하지 않았다.

백정들은 돈이 있어도 기와집에 살 수 없으며, 일반민들과 떨어진 성 밖의 일정 지역에 모여 살았다. 명주옷을 입거나 망건, 가죽신을 신을 수 없었고 두루마기도 입을 수 없었다. 신발도 맨발이거나 검정 버선에 짚신을 신었다. 머리도 삭발을 해야 하고 수염도 길러서는 안 되었다. 털모자도 쓸 수 없고, 상투를 틀지 않은 채 패랭이를 써 신분을 드러내야만 했다. 심지어 패랭이 갓 끝도 대나 구슬, 베로 만든 건 멜 수 없었으며 종이나 짚으로 새끼를 꼬아 메야만 했다. 그리고 여자들은 비녀를 꽂을 수 없었다. 일반민 어린이에게도 항상 복종하고 '소인'이라 칭해야 했으며, 나란히 길을 걸을 수 없었다. 성과 이름도 제대로 없었고, 호적에 올리기 위해 이름을 썼지만 '금걸', '만석', '억석', '무검', '소개' 등과 같은 단순한 이름을 써야 했다. 특히 이름에 충효인의와 같은 의미를 담은 한자는 쓸 수 없었다. 일반민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실 수 없었고, 음식점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겨우 음식점에 들어가도 토방에 따로 앉아서 술을 마셔야 했다. 백정의 차별은 죽은 후에도 지속됐다. 상복이나 상여를 사용할 수 없었고, 풍수를 볼 수 없었고 묘지도 따로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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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평사 전국 대회 모습.

이렇게 백정들은 온갖 제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신분제가 폐지됐다고 하나 일반민과 백정은 너무나 쉽게 차이가 드러났다. 만약 백정이 앞서 열거한 관습을 어기면 어김없이 마을 주민들의 집단 린치가 가해졌다. 이러한 집단 린치를 당시 행정기관들은 막을 수 없었다. 역으로 백정마을 안에서 생긴 분란은 어지간하면 행정기관들이 개입하지 않고 알아서 처리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백정들 간의 결속은 유지될 수 있었다.

1920년대 백정들의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최소 3만에서 최대 40만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형평사 창립 당시 백정을 40만이라고 했고, <시대일보>에 따르면 1926년 백정 단체의 수가 194개 회원 28만 명에 달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3만 3700명, 일제가 제작한 '조선의 치안상황'에는 3만 3779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절반의 성공' 형평사 운동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통치로 한발 물러섰고,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농민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청년운동 등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백정들도 이러한 사회적 흐름을 알고 있었다. 그때 백정들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온다.

일본에도 백정들과 비슷한 천민집단이 있었다. '에타'라고 불리는 일본 천민 집단은 가죽 세공, 도살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자신들끼리 부락을 지어 살았으며, 에타는 결코 평민으로 신분 상승할 수 없었다. 이들도 일본 메이지 유신 당시 일반민들과 동등한 신분이 됐으나 차별은 여전했다. 1920년대 초 에타 출신 13살 아이는 소학교에서 교사에게 신분차별성 모욕을 당하자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사건, 에타라는 신분을 속이고 결혼한 것은 이혼 사유로 정당하다는 판결, 에타 출신이 소학교 교원이 되자 뒤늦게 면직된 사건 등이 있었다. 이렇듯 에타는 여러 상황에서 백정과 유사했다.

이에 일본에서 1922년 3월 2일 수평사라는 조직이 창립됐다. 이듬해인 1923년 3월 2일 일본 수평사 제2회 대회에서 '수평운동의 국제화에 관한 건'이 의결됐고, '수평사와 조선인의 제휴에 관한 건'이 논의됐으나 보류됐다. 1924년 열린 제3회 수평사 대회에서는 '조선의 형평운동과 연락을 도모하는 건'이 가결됐다.

당시 일본과 한반도는 하나의 나라였다. 따라서 일본에서 일어난 사회조직이나 사회현상은 즉시 조선에도 알려지고 신문에 언급됐다. 일본의 수평사가 생기자 백정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편, 1920년대 들어서면서 백정들의 경제적 기반이 약해지고 있었다. 1911년 11월부터 시행된 '도장규칙'으로 도축장은 지방 장관의 허가를 받고 엄격한 검수를 거쳐 운영되도록 했다. 일부 재산이 있던 백정들은 이 규칙을 토대로 더욱 안정적인 수입을 올렸으나 대부분의 단순 백정 노동자들은 일거리가 급감했다. 또한 도축 후 암묵적으로 백정들이 소유할 수 있었던 소가죽, 쇠기름 등도 마음대로 소유할 수 없었다. 게다가 백정들이 주로 했던 가죽가공도 근대식 피혁공장이 들어서면서 수입에 큰 타격을 입었다.

1923년 초 당시 <동아일보> 초대 진주 지국장을 지낸 강상호는 백정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중 일본의 수평사 소식에 자극을 받아 이학찬, 장지필에게 형평사 설립을 논의한다. 이들은 형평기와 형평가, 인권 혁명가를 만들고, 형평운동을 상징하는 마크를 제정했다. 이들이 만든 형평사 설립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사랑은 인간의 본성이다. 고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여 교육을 장려하고 우리도 참다운 인간으로 되고자 함이 본사(형평사)의 추지이다. (중략) 본사는 시대의 요구에 의해 사회적 실정에 대응하여 창립되었으며, 우리도 조선 민족 2000만의 한 사람으로서 갑오년 6월 이후 칙령에 의해 백정이라는 칭호가 없어지고 평민이 되었던 바, 사랑으로서 상호 부조하고 생명의 안전을 도모하고 공통의 번영을 기하고자 한다."

형평사 설립을 주도한 이학찬은 진주 중앙시장에서 정육점을 하던 자산가였다. 하지만 그는 재산이 있어도 아들을 학교에 입학시킬 수 없었다. 장지필은 의령 백정 집안에서 태어났다. 머리가 총명하던 그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공부해 일본 명문 메이지 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전공했다. 조선인 유학생들 가운데 가장 우수했으나 가정 형편으로 3학년 때 중퇴해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조선총독부에 취직하려 했으나 백정 출신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형평사 설립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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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형평사 창립 총회 모습.

1923년 4월 24일 진주에서 형평사 창립식을 열었다. 이 형평사 창립에는 양반 출신인 신현수, 천석구 등도 적극 동조했다. 형평사 창립과 백정들의 계급타파 운동은 언론들도 우호적으로 보도했다. 형평사는 불과 1년 사이 전국에 79개 지사·분사를 거느리는 조직이 됐으며, 경남에만 19개의 지사와 분사가 있었다.

형평사가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되자 본사를 진주에서 서울로 옮기자는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1924년 2월 부산에서 열린 임시 전국대회에서 본사의 위치 문제를 놓고 불화가 생겼다. 영남권 간부들은 두 달 뒤인 1924년 4월 전국대회에서 본사 위치 이전을 논의하자고 했으나 이 결정에 불만을 품은 중부 지역 간부들은 1924년 7월 별도 조직을 만들기로 했다.

결국 형평사 조직은 남북 양파로 갈라지게 됐다. 영남권 간부들은 '진주 형평사 연맹 총본부'라고 해서 진주를 거점으로 삼았으며, 호남과 충청권 간부들은 '형평사 혁신 동맹'을 창립해 서울에 본부를 두었다. 진주와 마산, 부산 등이 남부파의 거점이 되었다.

두 세력의 싸움은 1925년 8월 15일 대전에서 열린 형평 사원 대표자 회의에서 통합을 선언하고 본사를 서울에 두기로 하면서 일단락됐다.

이렇게 내부 갈등을 봉합한 형평사는 여러 사회단체와 교류하면서 조직을 확대해 나간다. 특히 간부들 가운데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이 '무산운동'이라는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으로 확장해 나가자 일제는 형평사에 대해 탄압하기 시작했다. 1927년 일제는 고려혁명당을 적발했다. 만주지역 독립군 단체인 정의부와 연계된 천도교·형평사 간부들이 고려혁명당 간부를 겸하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형평사 회원들이 다수 체포됐으며 장지필 등은 주모자로 몰렸다.

고려혁명당 사건 이후 형평사 운동은 온건파와 급진파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온건파는 백정들의 권리를 찾는데 집중하자고 했고, 급진파는 여러 세력과 연대해 사회주의 혁명으로 모든 계급을 타파하자고 주장했다. 그 가운데 사회주의 사상을 따르는 급진파들이 형평사 조직 중 상당수를 차지하게 됐다. 이에 일제는 다시 한번 형평사를 무너뜨리기 위해 1933년 '형평사 전위 동맹' 사건을 일으킨다. 일제는 형평사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모종의 비밀 결사단 체가 조직되었다며 활동가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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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평사 지도자 중 한 사람인 강상호 모습.

사실 이런 사건으로 중형을 받거나 극형을 받은 간부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핵심 활동가들이 적게는 몇 달, 길게는 수년 동안 구속되자 형평사 활동은 자연스럽게 약화됐다.

결국 형평사 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회유로 1935년 '형평사'라는 이름을 버리고 '대동사'라고 이름을 바꿨다. 1936년 1월 10일 대전에서 전조선 임시 대회가 열렸다. 몇 년 만에 열린 전국대회였지만 결의된 내용은 소가죽을 대동사에서 통제 매매하여 이익을 도모하고자 한다는 내용에 불과했다. 사실상 이익집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해 4월에 열린 전국 대회에서도 지부 조직이나 본부 유지, 본부 회관 건립, 소가죽 통제, 수육 판매 조합 조직 등 경제적 이익집단으로서의 내용 밖에 없었다.

진주에서 시작된 형평사 운동은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내부 대립과 이익집단으로 몰락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많은 간부들과 활동가들이 당시 진보적 항일단체에서 활동을 한 것이 밝혀지면서 최근에는 반봉건민족운동으로 역사학자들에게 평가받고 있다.

한편, 백정들에 대한 차별은 형평사 운동으로 약화됐지만 그 후에도 일부 남아 있었다. 1960년대 전북 순창 출신 김광호 씨가 육군사관학교 4학년 때 백정 출신이 밝혀지면서 퇴학처분을 받은 사실이 있다. 이러한 백정 차별은 산업화로 인한 농촌공동체 해산과 주민등록 시행 등으로 1970년대를 지나면서 사라졌다.

참고자료

- 김재영, 「일제 강점기 형평운동의 지역적 전개」, 2007

- 윤철홍, 「박경리 '토지'에 나타난 진주지역에서의 형평사운동에 관한 소고」, 『법과사회』 49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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