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품고 새로움 덧대고…조선 후기 건축형태 '오롯이'
손님맞이 용도 바깥채…일본·중국 양식 섞인 근대 한옥으로 독특한 아름다움 간직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조각가 김종영 생가는 원래 본가와 별채로 구분된다. 본가는 현재 김종영 생가라고 불리는 곳이고, 별채는 도로 하나를 두고 떨어져 있는 사미루와 구문정을 말한다. 지금은 도로가 나서 갈라져 버렸지만 원래는 한울타리에 속한 건물이다. 본가가 안채 노릇을 했다면 사미루와 구문정은 바깥채라고 할 수 있다. 바깥채는 남성들의 공간으로 손님 대접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본가인 김종영 생가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200호로 지정돼 있다. 하지만, 같은 시기(1926년)에 지어진 사미루와 구문정은 조선 후기 독특한 건축 형태를 보존하고 있음에도 아직 인정을 못 받았다.

◇일본 양식이 가미된 사미루

사미루는 별채의 대문채다. 전통 양식에 일본 방식이 섞인 건물로 전형적인 근대 한옥 양식을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솟을대문 위에 누각을 세워 완성했다. 이는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공루(空樓)라는 건축 형태 중 하나다. 솟을대문이란 게 애초에 대문 지붕을 담장보다 높이 솟구치게 해서 권위와 위엄을 표시하던 것이었다. 여기에 누각을 올려세우면서 실용성을 덧붙였다. 누각 자체도 화려하다. 앞뒤로 틔어 있어 경치를 볼 수 있게 했다. 난간은 파만자(破卍字·卍자가 깨어진 형태) 모양을 하고 있다.

대문 안에서 보면 오른쪽에 온돌방이 하나 있다. 왼쪽에는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계단 옆으로 변소가 있다. 대문을 잠그는 빗장둔테가 거북 모양인 것이 독특하다. 거북은 장수의 상징이다.

화려하고 독특한 대문채 사미루. 공루라는 근대 건축 양식의 하나다. /이서후 기자

사미루(四美樓)란 이름은 '네 가지 아름다움을 갖춘 누각'이라는 뜻이다. 네 가지 아름다움은 천하에 좋은 날, 아름다운 경치, 기쁜 마음, 즐거운 일을 이른다. 중국 남북조 시기 문장가 사령운이 <의위태자업중집시서>에 적은 것이다.

사미루 건립 당시 현판을 조선 후기 문신 석촌 윤용구(1853~1939)와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1877~1955)이 썼다. 윤용구는 고종 때 벼슬이 예조·이조판서에까지 오르나 1895년 을미사변 이후로 관직을 버리고 서울 근처 장위산에 숨어 산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남작 작위를 주었지만 역시 거절하고 오직 글씨와 그림, 거문고와 바둑으로 세월을 보낸 이다. 이강은 조선 왕족 중에서도 끝까지 일제에 비협조적이었고 독립운동가들과 가까이 지냈다. 그래서 끝내 모든 지위를 박탈당한 이다. 그는 사미루와 함께 구문정 현판도 썼다. 김종영의 증조부 모연 김영규는 사미루를 지으며 두 사람이 쓴 현판 중에서 윤용구의 것을 사미루에 내걸었다. 지금은 복제품이 걸려 있고 진품은 김종영미술관 쪽에서 가져갔다.

사미루 거북이 모양 빗장둔테./이서후 기자

◇중국 양식이 섞인 구문정

구문정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일자형 건물이다. 앞으로는 툇마루를 내고, 대청 좌우로 1칸 반 규모의 온돌방을 들였다. 왼쪽 방은 두 짝 여닫이 세살문이 있고 그 위에 작은 창이 나있다. 툇마루에는 사미루와 같은 파만자 모양의 난간이 있다. 현재 대청에도 우물 정(井)자 모양 살문이 달렸는데, 이는 1970년대 구문정을 살림집으로 쓰면서 새로 달아낸 것이다. 구문정은 건축 당시에 전통 목수와 함께 중국인 목수가 같이 일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화려하고 독특한 근대 한옥이 탄생했다. 경남도가 2004년 발행한 <근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 사업 보고서>에 나온 구문정 설명을 보자.

구문정 툇마루와 난간./이서후 기자

"근대 한옥으로 치목이 정교하고 비례가 아름다운 주택이다. 형태적으로 전통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풍부한 수납공간과 완성도 높은 다락, 미세기 유리문과 출입구 상부의 채광을 겸한 환기창을 시설하는 등 주거의 근대적 요소가 확연히 드러나는 건축물이다."

구문정은 애초에 주거용이 아니었다. 바깥채 용도에 맞게 손님을 맞이하고 모임을 여는 곳이었다. 그래서 대청과 좌우 온돌방 사이 문을 위로 올리면 전체가 하나의 공간이 되어 많은 이들이 함께 앉을 수 있도록 했다. 축담에는 지금도 쇠고리가 남아 있는데 모임이나 연회를 열 때 차양을 걸도록 한 것이다. 구문정 주요 기둥은 금강산에서 가져온 금강송이다. 조선 시대에는 따로 관리를 두어 이 금강송을 관리하기도 했다. 구문정 거주자 말로는 지금도 금강송 기둥에서 소나무 향이 난다고 한다.

구문정 축담 쇠고리. 연회 때 차양을 걸던 용도다./이서후 기자

모연 김영규는 이 바깥채를 지으며 후손들이 선조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 열심히 공부하고 올바르게 살라는 뜻으로 구문(求文)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서후 기자 who@idomin.com

※참고 문헌

<창원 소답동 김종영 생가 기록화 보고서>(문화재청, 2012) <경남 지역 공루의 건축적 특성에 관한 연구>(정경석 경남대 석사논문, 2005) <김종영, 그의 여정>(김종영미술관, 2017)

구문정 툇마루와 난간 아래 벽돌. 금강송 기둥. 전통과 중국식이 섞여 있다./이서후 기자
고종의 다섯 째 아들 의친왕 이강이 쓴 사미루 글씨./김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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