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주기 맞은 반핵인권운동가 김형률의 방에서 생각한다
부산항 보이는 낡은 아파트
책상·컴퓨터·옷가지 그대로
유전으로 희귀병 앓으면서도
피해자 위해 탄원서 쓰던 곳
추모 전시·다큐 제작 이어져

부산 동구 수정동 수정아파트. 산복도로 주변으로 띄엄띄엄 18개 동이 들어선 이 아파트는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 중 하나다. 아직도 화장실을 공용으로 쓰는, 마치 근대 유산 같은 11평 작은 집들이 복도 좌우로 촘촘히 늘어서 있다. 수정아파트 3동 206호. 원폭 피해자 2세이자 반핵평화운동가 고 김형률이 2005년 5월 29일 눈을 감을 때까지 생애 마지막 5년을 지낸 곳이다. 지난주 이 방에서 몇 시간을 보내다 왔다. 그의 13주기 추모 전시 설치 작업을 함께한 것이다.

◇나의 병은 역사적이다

1970년 7월 28일 부산에서 태어난 김형률은 태어나서부터 바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동생은 두 돌이 되기 전 폐렴으로 죽었다. 다행히 김형률은 살아남았지만 그 역시 허파가 거의 기능을 잃은 채 살았다. 그런 와중에 학교도 다니고 사회생활도 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다 2002년 입원 중 읽은 논문을 통해 자신이 핵폭탄 피해로 말미암은 유전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선천성 면역 글로불린 결핍증. 태어날 때부터 면역 기능이 망가진 희귀병. 그의 어머니는 1945년 히로시마 원자폭탄 피해 1세대다.

"나의 병은 역사적인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아픈 원인을 알게 된 서른두 살 김형률은 2002년 3월 22일 한국청년연합회 대구지부 사무실에서 자신이 원폭 피해로 후유증을 앓는 피해자 2세임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연다. 원폭 피해자 1세대의 후유증마저도 개인 질병으로 여겨져 국가 지원이 없던 시절이었다. 2세대 피해자는 그 개념 자체도 없었다. 병약한 청년의 용기있는 외침은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전국을 돌며 원자폭탄 피해자 2~3세들의 실태를 알리는 활동에 전념한다. 반핵인권운동가로서 불꽃 같은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부산 수정아파트 3동 206호 반핵인권운동가 김형률의 방. 어머니 이곡지(왼쪽) 씨와 이노우에 리에 작가가 추모 전시 작업을 하고 있다. /이서후 기자

◇마치 운명 같은 전시

지난 주말까지 거의 2주 동안 수정아파트 김형률의 방에서는 그의 13주기를 기리는 전시 '당신의 방에서 생각한다'가 진행됐다. 창원에서 활동하는 이노우에 리에(33) 작가와 관객이 함께하는 일종의 설치 작업이다. 이번 전시는 부산 다큐멘터리 제작그룹 '탁주조합' 김지곤 감독이 2016년부터 만드는 <리틀보이 littleboy-12725> 제작 과정의 하나다. 이는 김형률이 남긴 일기를 통해 그의 일대기를 살펴보는 다큐멘터리다.

리에 작가가 추모 전시를 맡은 건 마치 운명 같았다. 그 역시 원폭 피해자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리에 작가는 히로시마와 함께 원자폭탄이 떨어진 나가사키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가 원자폭탄 피해 1세대다. 그는 원폭 피해자가 많은 나가사키에서 자라며 그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다. 리에 작가는 평소 친분이 있던 김지곤 감독과 반핵 관련 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만드는 영화 내용을 듣고 추모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여기서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 하나하나가 아직 기적같이 느껴진다. 이 시간이 소중하다. 지금 함께하는 것 중에서 하나라도 없으면 난 여기에 없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고 더 열심히 묵묵히 내가 해야 할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난 평범한 사람이고 아무 힘이 없지만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들을 하려고 노력한다. "(이노우에 리에, 5월 18일 작업일지 중에서)

◇부산항이 보이는 작은 방

리에 작가는 한지에 글을 적은 후 바느질로 이를 이어서 방안에 설치하는 작업을 했다. 글은 김형률이 남긴 일기에서 옮겨 적기도 하고, 리에 작가가 관객들과 작업을 하면서 든 생각,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 중에서 골랐다. 지난 19일에서 22일까지는 신청자를 받아 매일 그의 방에서 함께 작업을 했다. 그 결과는 25일과 26일 이틀 동안 전시됐다.

지난 21일 부산 수정아파트를 찾아 작업을 함께 했다. 노크를 하고 현관을 여니 리에 작가와 김지곤 감독을 포함한 탁주조합 촬영팀, 그리고 김형률의 어머니 이곡지(79) 씨와 아버지 김봉대(81) 씨가 반갑게 손님을 맞이했다. 뜻밖에 따뜻하고 느낌이 좋은 방이었다. 산등성이에 들어선 아파트라 창밖으로 멀리 부산항이 보였다. 13년이 흘렀지만 방은 책상도 컴퓨터도 옷가지도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 방은 원래 그의 부모가 요양을 겸해서 마련해 준 곳이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병이 말을 듣지 않자 편하게 지내기나 하라는 뜻이었다. 그는 이 방에서 죽음 같은 폐렴을 안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원폭 피해자를 위한 탄원서를 보냈다.

"죽어가는 몸으로 쉽지 않겠지만, 우리의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김형률, 2004년 메모 중)

김형률이 세상을 뜬 지 13년이 지났지만, 생전에 쓰던 물건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서후 기자

◇애틋한 아들의 흔적

리에 작가와 함께 바느질을 하는 동안 그의 어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합천 사람이다. 일제강점기 많은 합천 사람이 히로시마로 건너가 일을 했기에 합천에는 유독 원자폭탄 피해자가 많다. 그래서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린다. 히로시마에 살던 어머니 이곡지 씨가 5살 때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리고 다른 한국인과 함께 쫓기듯 합천으로 돌아왔다. 이후 결혼을 하고 부산에 자리를 잡은 부부는 아들 넷, 딸 둘을 낳았다. 그런데 유독 김형률과 그의 쌍둥이 동생만 피폭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오만 약을 다 먹이고, 아무리 살릴라 그래도 안 되더라. 자식이 이거 하나였으면, 지금 내가 미치고도 남았을 기라."

아버지 김봉대 씨는 양쪽 무릎에 아이들을 줄줄이 앉히고 직접 밥을 먹일 정도로 자식을 끔찍이도 아꼈다. 손찌검은 물론 눈 한 번 흘긴 적이 없었다. 그런 김 씨에게 김형률은 죽어도 계속 눈에 밟히는 자식이다. 김 씨는 아들의 장례식에도 죽어가는 아들이 뱉은 피가 그대로 묻은 코트를 입고 참석했다. 그가 이 방을 지금까지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이 애틋함 때문이다. 지금도 김 씨는 아침마다 아들의 방에 향을 피운다. 그리고 그 곁에서 이 씨는 불경을 외운다.

◇강하고 빛나는 아름다움

어머니와 아버지는 작업 하는 내내 리에 작가와 촬영팀을 마치 아들딸처럼 살뜰하게 살폈다. 아버지는 무뚝뚝하지만, 속 깊이 정이 많은 분이었고, 어머니는 밝고 해맑은 분이었다. 김형률이 무너지는 몸을 안고 반핵평화인권운동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도 이분들의 성정을 물려받은 까닭일 테다.

"김형률 선생님은 부모님과 같이 너무너무 좋은 분이고 알면 알수록 멋있는 분이다. 이 방에 있으면 그런 기운들이 한없이 느껴진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고독했을까. 하지만, 선생님은 그걸 이겨내고 세상을 바꿨다. 이 방에서 글을 쓰고 작전을 세우고 행동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중략) 난 이런 선생님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난 이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다. 여기에 이런 따뜻하고 강하고 빛나는 아름다움이 있었다는 걸."(이노우에 리에, 5월 17일 작업일지 중에서)

2016년 5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피폭 한국인을 지원하기 위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2003년 김형률이 제안한 지 13년 만이었다. 하지만, 지원 대상은 원폭 피해 1세대와 당시 임신 중이었던 태아로 김형률과 같은 원폭 피해 2·3세는 제외됐다.

지난해 4월 부산 금정구 부산영락공원에 있던 김형률 묘가 부모의 고향인 합천군으로 옮겨졌다. 아버지 김봉대 씨의 뜻이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