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경영에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재벌 출신으론 수목장 치른 첫 사례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가 죽은 뒤에 내려지는 법이다. 살아생전에 한 일들은 그가 죽고 나면 좋으면 좋은 대로 안 좋으면 안 좋은 대로 다 드러나 도마 위에 오른다.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 일가의 '갑질' 논란이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는 가운데 지난 20일 타계한 LG그룹 구본무 회장의 생전의 삶이 화제가 되고 있다. 국내 재벌들 가운데 LG그룹은 비교적 깨끗한 편이라고 알려져 왔다. 게다가 투명한 경영, 사람 존중, 사회 환원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으로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LG그룹이 호평받는 그 선두에는 구 회장이 있었다. 그는 평소 검소하고 소탈한 성품이었으며, 여느 재벌들과는 달리 화려한 삶을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외모도 귀공자 타입이라기보다는 털털한 이웃집 아저씨를 닮았다. 간혹 출장을 갈 때면 수행비서 한 사람만 동행시켰고, 개인 일정은 늘 혼자 다녔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도 기업의 사회적 책무가 강조돼 왔다. 좀 규모가 있는 기업들은 '사회공헌팀' 같은 조직을 만들어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데 대부분은 체면치레용이다. 그런데 LG는 좀 달랐던 것 같다. 특히 2015년 'LG 의인상'을 제정해 현재까지 72명의 의인(義人)을 선정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일은 국가가 할 일이다.

구 회장 타계 후 언론보도로 미담 하나가 새로 공개됐다. 구 회장은 '소록도 할매 천사'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간호사들에게 LG복지재단을 통해 매달 수백만 원의 생활비를 지원해 왔다. 구 회장은 소록도 할매 천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 최저 수준의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먼저 생활비 지원을 제안했다고 한다. 재벌가를 비판할 때 자주 등장하는 단골메뉴 중 하나는 병역문제다. 삼성 등 대표적 재벌가의 자녀 가운데는 이런저런 이유로 군대에 가지 않은 사람이 많다. 그런데 LG 집안은 구 회장 본인을 비롯해 동생, 조카들 모두 육군 현역으로 '만기 제대'를 했다고 한다. LG가 '오너 리스크 무풍지대'로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구 회장의 진면목은 살아생전보다 타계 후에 더 빛을 발하고 있다. 연명치료 거부, 비공개 가족장, 화장(火葬) 등 구 회장의 '마지막 지시' 세 가지는 감동적이다. 병세가 악화해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후 "나 때문에 번거로운 사람이 있어선 안 된다"며 이런 지시를 했다고 한다. 비공개 가족장에다 '조화·조의금 사절'은 재벌집안이니 그렇다고 쳐도 연명치료 거부와 수목장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1998년에 타계한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재벌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화장을 해 당시 큰 화제가 됐었다. 최 회장의 화장 결정은 우리 사회에 화장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가 있다. 평소 새와 숲을 좋아했던 구 회장은 경기 광주시 곤지암에 본인의 아호를 딴 '화담(和談)숲'을 조성했다. 그는 이곳에 수목장으로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했다. 재벌 가운데 수목장은 구 회장이 처음이다.

정운현.jpg

며칠 전이 초파일이었다. 스님들이 열반에 들면 화장, 즉 다비를 한다. 유명한 스님은 유골을 수습하여 부도(浮屠)라고 불리는 탑에 모시기도 한다. 그러나 진짜 고승들은 다비 대신 스스로 '천화(遷化)'를 택한다. 천화란 임종을 앞둔 고승이 홀로 깊은 산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을 말한다. 걸을 수 없을 정도까지 걸어가 어느 지점에서 쓰러지면 스스로 나뭇잎을 주워 모아 바닥에 깔고 다시 그 몇으로 자신을 덮어 생을 마무리한다고 한다. 이런 죽음은 아무도 알 수 없어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몇몇 고승들의 흔적을 알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승열전>의 저자 윤청광 씨는 생전에 법정 스님이 또 다른 형태의 천화를 꿈꿨다고 얘기한 바 있다. 밤배를 타고 가다가 아무도 몰래 어둡고 깊은 바다에 뛰어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물론 법정 스님은 이를 실행하지는 못했다. 수목장이든 천화든 귀결점은 한 가지다. 원초적 고향, 자연의 품에 안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