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그 골목에 갔다] (8) 창원 외동
'쓰레트집' 150채에 3000여 명 북적북적 건물과 골목 사라져

창원병원 옆 외동 골목….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 같다.

다닥다닥 붙어 한때 150채가 넘던 '쓰레트집'에 3000명이 넘던 주민들이 불과 15년 전까지 살았으니까.

골목 끝 당도산을 넘으면 내동마을이 나왔고, 그래서 외동이라 이름 붙여진 마을.

1980년대와 90년대 가난한 슬레이트 지붕의 이 동네는 얼기설기 20개 30개가 넘는 단칸방을 만들어 창원공단 노동자들에게 세를 주면서 달동네라고도 불렸다.

지난 2006년 6월 <경남도민일보> '골목과 사람' 취재를 위해 이곳을 찾았을 땐 철거작업이 거의 마무리될 때였다. 집 있고 땅 있는 사람들은 인근 중앙동이니 토월동, 사파동이니 다들 옮겨갔지만, 오갈 데 없던 사람들은 황량한 마을의 끄트머리를 지키고 있었다.

2006년 6월 24일 자 기사

그때 여든한 살 김 씨 할머니도 그중 한 분이었다. 혼자 살면서도 사람들 만나봐야 세상 욕밖에 더하겠냐면서 근처 경로당도 찾지 않던 분이었다. 그분 소식은 과연 들을 수 있을까?

10년 만에 다시 찾은 건 지난해 4월 21일이었다.

온 천지가 유채꽃 꽃밭이 되어있었다.

"동네 입구에서 가게 하던 황 씨 집 장모 같은데…. 그때 이 양반이 가족들하고 이사를 같이 안 갔었나? 돌아가셨겠지. 그때 벌써 팔순 넘었다면서?"

당도산 언저리 법청사 앞에서 칠순의 김 씨가 말했다.

외동마을에서 태어나 지금 사는 인근 중앙동까지 이 일대를 벗어난 적이 없다는 김 씨는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세상살이에 불만을 가진 대개의 범부가 욕부터 시작하는 것과 달랐다.

시계방향으로 시간대별 외동 골목 변화. 유채꽃 천지였던 2017년 4월의 창원병원 옆 옛 외동골목 자리./이일균 기자

"집도 농토도 빼앗기듯 쫓기났지만 후회는 안 하요. 집 하나 얻어 갔으면 됐지. 내 하나 희생해서 나라가 이만큼 나아졌다 아이가."

"아파트 들어선 것보다는 안 낫나? 이래 동네 흔적은 남아 있응께. 집 있는 사람들은 처음엔 토월동 사파동 봉곡동으로, 나중에는 옆에 중앙동에 단지를 만들어 이사를 갔지."

하, 이런 분이 있구나.

하지만 사람들 속이 다 같을까. 날 더울 때 유채밭에서 나는 '꼬롬한' 향처럼 속이 꼬였던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제대로 이주한 사람들은 집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70% 정도였다지 않나. 예순두 살 김 씨가 그랬다.

"억울치. 나는 내동 살았는데 70년대 말에 박통한테 땅이고 집이고 진짜로 뺏기다시피 안 했소. 집 한 칸이라도 장만해갔으면 다행이지. 안 그런 사람이 더 많아."

꽃 하나 피지 않은 황량한 들판을 바라보던 2018년 2월 창원병원옆 옛 외동골목 자리의 할매./이일균 기자

그때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가 나오려니 했다. 하지만 생활력 넘쳐 보이는 그는 이내 지금 이야기를 했다.

"지금은 요서 노점하고 있지. 벚꽃 필 때는 옛날 내동 있던 기능대(현 폴리텍대학) 앞에서 노점 하고, 지금처럼 봄꽃 필 때는 여서 하요. 좀 있다 장미꽃 피면 가음정동에 가야지."

"여름에는 동해로 가서 낙산이나 경포대 해수욕장서 또 하고. 가을 되면 또 여기로 오지. 코스모스가 좋거든. 겨울에는 상남동에서 호떡 팔고."

"가족들 입에 풀칠 할라카먼 한 달에 200은 벌어야지. 그래서 장사 안 될 때는 대리기사 안하요. 내가 젊었을 때부터 시내버스 기사를 했거든."

끝이 없을 것 같던 이야기는 곡절 끝에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왔다. 그는 3000명이 넘던 외동마을 주민들이 어디로 옮겨갔는지 말했다.

"3분의 2가 넘던 세입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지. 운 좋은 사람들은 개나리아파트 임대로 갔지마는. 흩어졌지 뭐."

외동 유채밭을 보면서 뿌듯하다던 칠순의 김 씨는 "발전을 실감한다" 했다.

2018년 5월 100종류가 넘는 양귀비가 유채꽃 진 창원병원 옆 옛 외동골목 자리를 메웠다. /이일균 기자

예순둘의 김 씨는 골목이 사라진 지금 유채밭 한쪽에서 노점을 한다. 커피와 음료수, 핫도그를 판다.

그리고…

아직 싸늘한 겨울날씨에 다시 '외동옛터' 비석 앞에 선 때는 올해 2월 17일이었다.

아무도 없으려니 했다. 누가 있었다. 2006년 동네 입구 김씨 할매처럼 늙고 힘없는 할매가 돌처럼 앉아있었다.

앉은 자리가 이상했다. 전기휠체어인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마트용 장바구니차(캐리어)다. 거기에 짐을 넣어 자리를 만들고 그 위에 앉았다.

"여기서 뭐하세요? 안 추우세요?"

"바람 쐬고 안 있소."

"이 근처에 사세요? 저는 10년 전에 여기 온 적이 있는데 그때도 사셨어요?"

"10년 전엔 여기 안 살았소."

그러고는 끝. 잠시 주었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앞만 망연히 바라본다. 더는 말 걸지 말라는 기운이 느껴졌다.

뭘 보시는 걸까? 꽃 하나 피지 않은 황량한 들판? 직접 살지 않았지만, 언젠가 보았던 '쓰레트집'과 그사이 골목?

오늘 글을 쓰기 전, 현장을 다시 확인해야 했던 나는 지난 19일 이곳을 찾았다.

한바탕 유채꽃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빨갛고 파랗고, 좀 덜 빨간 꽃들이 천지로 피었다.

"빨간 종류는 전부 다 양귀비 아임미꺼. 양귀비 종류가 100종류가 넘어요."

"여기 양귀비는 정관수술해서 제 구실을 못한다 카데예."

1년 전 예순둘의 김 씨가 있던 자리에 다른 얼굴의 아저씨가 있었다.

'정관수술' 이야기에 부인으로 보이는 아줌마가 웃었다. 그 말이 나올 때마다 매번 우스운 모양이다.

"파란색 쪽은 카네이션이라 카데예."

또 1년 뒤 여긴 무슨 꽃이 피어있을까?

도심공원 일몰제, 민간개발특례사업지구 이야기가 나오는 이곳은 또 어떻게 변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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