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마저 자연이치로 다스리던 지혜
물질문명·이기주의로 소멸 위기 맞아

사람이 하늘을 머리에 이고 이뤄내는 일들 가운데서 농사를 으뜸으로 쳤던 때가 있었다. 그 농사는 하늘 뜻 내려받아 땅 위에다 지어내는 인간의 거룩한 보람이자 사람 사는 상징이어서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 하던 역사였다. 그런 농사 지으면서 하늘의 뜻을 읽어내는 지혜로 그려낸 것이 24절기도였다. 입춘에서 대한까지의 절기와 절기 사이를 15∼16일 간격으로 해서 24절기를 따라가면 365일이 된다.

하늘 뜻이 땅에 전해지면 땅속과 땅 위의 만물들은 일제히 움이 트고, 새순이 나와 잎과 줄기로 자라고, 꽃과 열매가 되어 인간 짐승의 먹이며 집과 옷의 감이 되고, 약이 되며, 계절을 그려내는 색채와 풍경이 되고, 밤낮의 길이가 되고, 사랑과 죽음이 된다. 그리고 약속된 시간이 되면 만남과 헤어짐, 소멸과 생성과 윤회의 강으로 흘러 전설의 베틀로 역사를 짜서 사람과 하늘의 비밀을 곱게 싸서 햇볕과 바람을 쐬어 시간을 만든다. 농사는 그런 것이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꼭 그만그만한 빠르기로 씨줄이 되고 그만그만한 느림으로 날줄이 되어 모든 관계의 필연성을 노래하고 모든 관계의 아름다움을 춤췄다.

오늘은 소만(小滿)이다. 입하와 망종 사이에 있다. 여름이 시작되었으나 보리가 익는 망종까지는 아직 보름 정도가 남은 시기여서 먹을 양식으로 삼을만한 것이 몹시 모자라는 때였다. 웬만한 풀잎, 뿌리, 나무껍질 중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거의 먹어치운 데다가 입하 지나면서부터는 나물거리가 되는 식물에는 독성이 강해지기 때문에 먹기가 어려웠다. 농사짓던 시절에는 소만 앞뒤를 가장 가파른 보릿고개라 불렀다. 소는 조금 모자라다, 조금 덜하다는 뜻을 지녔다.

계속되는 허기를 넉넉히 채우려면 때가 될 때까지 좀 더 기다려야 하고, 그때는 하늘이 정한 것이라는 믿음을 지키고 키우는 인내의 지혜가 곧 소만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하늘이 정한 것이라지만 당장 주린 배를 채워야만 살 것 같은 위기 앞에서 어찌 보름 동안을 참는단 말인가. 그래서 어떤 이는 남의 것을 훔쳐 먹거나 빼앗기도 하고, 하늘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때 가장 반갑고 고맙게 만나서 배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이 물이었다. 마을의 샘물이나 옹달샘은 물론 시냇물, 도랑물도 맛있게 먹었다. 참으로 물같은 인심이라는 말이 생길만도 한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절엔 꼭 소만 무렵이 되면 가뭄이 들게 마련이고, 마실 물도 귀해져서 굶주림은 더욱 처절했다. 그래도 하늘을 두려워하면서 모질고 슬픈 보릿고개를 넘어가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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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이라는 본능마저도 자연의 이치로 다스리던 인류의 아름다운 정신유산이, 물질문명과 이기주의라는 괴물의 습격을 받고 점점 약화되고 소멸의 위기를 맞고 있다. 하늘의 뜻은 사람이 터득한 지혜의 선물이다. 이즈음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의 홍수에 떠내려가며 조금의 굶주림도 참지 못하는 어떤 몰골이 불쑥 섬뜩하게 다가와, 핵을 실은 미사일로 기어코 먹이를 강탈해 내려는 정치라는 이름의 폭력을 생각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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