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내음 가득한 그 집에 누가 살았나
1910년대 산 아래 기와집 수십 채
이원수 작가 <고향의 봄>서 묘사
김해 김씨 창원문중 세거지였던 곳
선생 외 여러 일족 '꽃대궐'서 지내

꽃대궐. 창원에 사는 이라면 바로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에 있는 한국 근대 조각의 선구자 우성 김종영(1915∼1982) 선생의 생가를 떠올릴 것이다. 가곡 고향의 봄(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이 만들어진 배경.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200호. 이 정도만 알아도 꽤 상식 있는 사람일 테다. 김종영 선생이 돌아가신 지금 꽃대궐은 과거의 어떤 것, 즉 역사 유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꽃대궐에 깃든 역사가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면, 또 그 역사를 지닌 인물들이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살고 있다면 어떨까. 창간 특집 기획 '꽃대궐 사람들'을 통해 앞으로 김종영 생가와 관련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할 예정이다. 이는 지난 시절 꽃대궐의 영화를 재구성하고 그 의미를 짚어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유물이 된 꽃대궐을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지역 역사와 문화로 이끌어내고자 한다.

◇꽃대궐 사람을 만나다 = 김세욱(49·사천시) 씨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그가 지난 2월 마산문학관에 기증한 <창원>이란 잡지가 인연이 됐다. 재경창원군학우회가 1956년 12월에 발간한 회지 형식의 창간호였다. 재경창원군학우회는 한국전쟁 직후 창원군 출신 서울 유학생들이 만든 모임이다. 잡지는 돌아가신 김 씨 부친의 유품이다.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김종영 생가 별채인 사미루(아래 왼쪽)·구문정(아래 오른쪽)과 본채(위). /일러스트 서동진 기자 sdj1976@idomin.com

사천에 사는 김 씨가 마산문학관을 찾게 된 사연도 독특하다. 그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오랜 기간 자신의 가족사를 연구해왔다. 그러다 지난 1월 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고문 검색을 하다 그의 고조부인 모연 김영규 관련 문헌을 찾았다. 고조부는 100여 년 전 노비산 자락에 집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바로 그 장소와 관련한 문헌이었다. 그래서 김 씨는 직접 장소를 확인하러 마산을 찾았다. 마산문학관이 들어선 언덕이 바로 노비산이다. 그렇게 마산문학관 주변을 수소문하다가 문학관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김 씨는 자신이 온 목적을 이야기했고, 문학관 사람들로부터 문헌 연구와 관련해 조언과 도움을 얻었다. 고마운 마음에 김 씨는 부친이 남기신 자료 중 <창원>을 기증하게 된 것이다. 글을 쓴 이들의 면면을 볼 때 잡지가 꽤 의미가 있다고 판단해 기사를 쓰고자 김 씨와 전화 통화를 했다. 김 씨의 부친이 이를 소유하게 된 사정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 씨는 부친에게 잡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1956년 12월 발간된 것으로 볼 때 부친이 서울에서 군대 생활을 할 때 서울에 살던 부친의 사촌 큰형에게서 받은 게 아닌가 추측했다. 그 사촌 큰형이 바로 조각가 김종영 선생이라고 했다. 김 씨에게는 오촌 당숙이 된다. 김종영 선생은 서울대 교수 신분으로 당시 이 잡지에 기고를 했다. 그리고 김 씨가 자료를 모으고 연구하는 고조부 모연 김영규가 바로 김종영 선생의 증조부라고 했다. 그가 바로 꽃대궐의 영화를 이룬 주인공이었다. 다시 말해 김 씨의 연구는 꽃대궐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김 씨가 전한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그가 어릴 적부터 30여 년간 그의 가족이 김종영 생가 별채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는 꽃대궐의 과거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그저 막연한 유물이던 꽃대궐이 구체적인 지역사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결국, 3월 초 사천에 있는 그의 집에까지 찾아갔다. 그가 차곡차곡 모은 자료를 살피며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 씨가 자료를 모으고 연구하는 가족사는 결국 꽃대궐의 역사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토대로 주말마다 관련 인물을 만나며 자료를 모았고, 꽃대궐 이야기에 대한 밑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걸출한 집안인 만큼 지역사에서 되새겨볼 만한 인물도 몇 있었다.

◇꽃대궐은 꽃대궐이 아닐지도 = "내가 자란 고향은 경남 창원읍이다. 나는 그 조그만 읍에서 아홉 살까지 살았다. (중략)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엘 다녔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되고 큰 기와집의 부잣집들이 있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 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도 아름다웠다." - 이원수 <자전회고록 : 흘러가는 세월 속에>(월간소년, 1980년 10월호)

1968년 소답리 풍경. 김세욱 씨 부모님 신행길 사진. /김세욱

이원수 선생이 고향의 봄이란 시가 나온 배경을 설명한 글이다. 그가 1911년생이니 아홉 살이면 1920년. 그러니 이 글은 1910년대 소답리를 묘사한 것이다.

당시 소답리는 김해 김씨 삼현파(三賢派) 중 창원문중의 세거지였다. 여기서 삼현은 조선시대 학문과 인품이 높았던 모암 김극일, 탁영 김일손, 삼족당 김대유를 말한다. 이 중 창원문중은 탁영 김일손의 후손들이다. 이들이 창원에 자리를 잡은 게 약 300년 전이다.

이원수 선생 글에 나오는 '작은 마을이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큰 기와집들'은 대부분 김해 김씨 삼현파 일족이 살던 집이었다. 당시에는 수십 채의 기와집들이 산 아래 나란히 있었다고 한다.

연구자들은 김종영 생가를 김종영의 증조부, 즉 김세욱 씨의 고조부 모연 김영규가 1926년 지금 자리에 새로 지은 것으로 본다. 별채인 구문정과 사미루가 자리를 잡은 것도 이 즈음이다. 그렇다면 이원수 선생이 말한 꽃대궐은 지금의 김종영 생가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1910년대에도 이미 수십 채의 기와집이 있었으므로 아이 눈에 대궐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연대와 관련한 부분은 확실한 고증이 필요하다.

자료를 보며 꽃대궐 이야기를 하는 김세욱 씨. /이서후 기자

김종영 생가는 기본적으로 김해 김씨 삼현파 창원문중의 본가, 즉 큰집이었다. 독자였던 모연 김영규가 네 아들(어릴적 죽은 아들 1명 제외)을 두었고, 네 아들이 다시 아들 13명을, 이들이 다시 20여 명의 아들을 두었다. 김종영 선생과 김세욱 씨의 부친이 이 20여 명에 속한다. 김종영 선생은 창원문중의 종손이기에 당연히 본가인 김종영 생가에서 지냈다. 하지만 선생 외에도 4대에 걸쳐 여러 일족이 이곳에서 태어나고 살았다. 김세욱 씨는 이를 두고 '팔촌이 한 정지(부엌)서 난다'는 옛 속담으로 표현했다. 김 씨의 부친도 김종영 생가에서 태어났다. 김종영 선생의 육촌 동생이자 지역 원로문인 운경 김종두 시인도 한때 김종영 생가에서 산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김종영 선생이 태어난 해는 1915년이다. 지금 김종영 생가라고 불리는 곳은 사실 선생이 태어난 곳은 아니라고 한다. 또한 창원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는 곧 서울로 유학을 떠나 1930년부터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다녔으니 이 집에서 보낸 세월이 그리 많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창원소답동 김종영 생가 기록화조사 보고서>(문화재청, 2012)

<미의 사제, 김종영을 만나다>(창원예총, 2011)

<김종영, 그의 여정>(김종영미술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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