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에 매몰되면 윤회 속박 벗지 못해
궁극적 존재 이유 알면 삶이 행복해져

치열하게 살았다. 먹고 입는 것이 많이 부족하던 시기에 짓궂은 가난을 벗어나려고 한눈팔지 않고 참 열심히 뛰었다. 일찌감치 중고등학교 입시경쟁을 거치고 좋은 대학을 가려면 재수는 기본이었다. 이유는 딱 하나.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가난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었고 돈은 행복과 동일한 것이었다. 부모들은 자신의 불행을 자식에게만큼은 이어지지 않게 하려고 논도 팔고 밭도 팔고 소도 팔고 살림 밑천을 다 팔아서 장남 하나라도 좋은 대학 보내 돈 많이 벌게 하는 것이 가문의 큰 영광이었다. 그러면 충분히 행복할 줄 알았다. 이게 60대 전후 보통사람들의 공통된 정서다. 다행히 국가의 경제발전을 따라 그런대로 풍족한 꿈을 이루었다고 대부분 생각한다. 성취감과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구조화된 삶의 패턴은 약간의 세련됨을 빼고는 여전히 그대로 닮은꼴로 전승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여전히 우리 아이들은 입시 경쟁에 모든 것을 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입시를 염두에 두고 아이들을 기르는 사회지도층 학부모들은 부와 권력의 세습을 위하여 나름의 영리한 자식교육에 공을 들인다. 하지만, 이게 인생의 다일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우리는 왜 사는가?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문득문득 들어지는 삶의 미진함이 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일찍이 두 가지 유형의 인간을 말했다. 소유를 지향하는 인간과 존재를 탐구하는 인간이 그것이다. 그것은 마치 불가(佛家)에서 중생과 보살의 인간관하고도 유사하다. 석가모니 불(佛)은 그의 12인연 법문에서 중생은 소유에 집착함으로써 어두워지고 어둡기 때문에 윤회의 속박을 면하지 못한다고 설했다. 중생이란 그가 많은 것을 가졌거나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 삶이 소유라는 틀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를 탐구하는 인간, 즉 보살(菩薩)의 삶이란 소유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삶의 진실한 모습을 찾아나서는 구도적 삶을 지향한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고(苦)와 낙(樂)은 무엇인지, 왜 오는지, 그 진실한 모습은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하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즐길 수 있는지를 추구한다. 그렇다고 보살이 소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존재가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소유란 수단 가치라는 것이다. 적당한 소유는 존재를 풍성하게 한다. 하지만, 소유에 매몰된 삶은 존재 이유를 망각하게 한다. 일찍이 경험할 수 없었던 물질이 개벽 되는 새로운 문명세상이 열리고 있지만 정작 그 주인공은 행복하지 않다고들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의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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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반도를 둘러싸고 새로운 희망이 싹트고 있다. 분열과 갈등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고 화해와 협력의 하나 되는 꿈이 떠오르고 있다.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안 된다. 경제적 풍요와 민족의 번영, 여기에다가 삶에 대한 성찰이 필수적이다. 존재로의 용기가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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