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루트 따라 떠나다] (6) 나를 스파이로 오인해 다오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가르다 호수 위쪽 도시
그림 그리던 괴테 주변으로 군중 모여들자 스파이로 오해받아
그는 없지만 그의 작품, 그때 모습 선명하게 남아

여행이라는 것은 그동안 오해했던 것들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 일이기도 하지만 오해를 받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를 통하여 나를 풀어헤쳐 놓기도 하고 가다듬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장소로, 오해를 풀어 버릴 수 있는 장소를 향해 내 발을 내딛는다.

가르다(Garda) 호수 상단부에 자리하고 있는 말체시네(Malcesine)로 가기 위해서 베로나로 내려가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올라오는 루트를 선택했다. 트렌토에서 1시간30분가량 달려서 도착한 베로나는 산이 낮고 대지는 광활했다. 베로나 역에서 주변을 살펴보면 산이라기보다는 그냥 언덕뿐이다. 그래서인지 베로나에선 좀 더 여유가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숙소인 안드레아 집은 말체시네 중심가에서 약 3㎞ 아래에 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우리 같으면 오래된 정자나무 크기의 올리브 나무가 정원과 산언저리에 가득했다. 마침 서쪽 하늘로 기우는 태양에 빛이 반사된 연한 회색의 올리브 나무 이파리가 눈을 부시게 했다. 열매가 탐스럽게 열렸는데 11월부터 1월까지가 수확 기간이다.

괴테는 가르다 호수 최북단 토르볼레에서 배를 잡아탔다. 호수는 남북으로 길고 동서는 짧아 띠같이 생겼다. 예로부터 바람이 강하기로 유명한 이 호수에서 괴테는 악명 높은 바람과 첫 조우를 했다. 주변은 변해도 호수의 사나운 물결은 변하지 않았으니 그 바람으로 인하여 말체시네로 피항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과의 만남이니 오늘은 여기에 내일은 저기에 있을 거라고 말할 수가 없을 수 있다.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게 된다. 말체시네 성채에서의 사건은 불의의 사태로 빠져 들어갈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어디를 가나 스케치를 하는 괴테는 피항 이튿날 성채에 앉아 스케치를 하는데 그 모습을 구경하고자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나중에는 군중이 아예 괴테를 둘러쌀 지경이 되었다. 그 와중에 성을 감시하는 사내가 나타나 괴테의 그림을 찢어 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행정관과 법원서기까지 출동했다. 괴테는 그 와중에서도 흥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을 즐기려고 했다. "나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태생인데 이 성채는 역사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이 폐허를 그리는 중이라오. 많은 여행자가 오로지 폐허를 보고자 이탈리아로 오는 것쯤은 당신들도 알지 않소?"

말체시네 성과 항구.

프랑크푸르트에서 왔다는 말에 마침 그곳에서 살았던 그레고리오라는 자를 불러와 괴테가 정말 프랑크푸르트 사람인지 대질 심문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레고리오와 괴테는 동향인 것처럼 말이 척척 통했다. 드디어 행정관과 법원서기는 그레고리오와 동행하는 조건으로 마음대로 구경해도 좋다는 허락을 했다.

괴테는 천만다행으로 만난 귀인 그레고리오를 생각하며 이렇게 적었다. "지상의 한 귀퉁이 이 무한한 고독 속에서 세상과 거리를 둔, 극히 선량한 두 사람하고만 같이 있으면서 나는 오늘 있었던 모험을 되돌아보고 인간이 얼마나 이상한 존재인지를 매우 생생히 느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면 이토록 안전하고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일을, 세상과 그 내용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횡령하려는 누군가의 변덕으로 말미암아 똑같은 일이 아주 불쾌하고도 위험한 것으로 바뀔 수가 있으니 말이다."

그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이곳 말체시네를 작은 동네에 비해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소개해 놓았다. 그만큼 그로서도 의미가 있었던 장소였기 때문일 수 있지만 스파이로 오해 받았던 것 때문일 수 있다. 성채는 상당히 잘 보전되어 있었다. 계단을 통해서 망루에 올라가니 과연 이곳이 요새가 될 법하였다. 호수 건너편에서 침입해 오는 적군들을 막을 최적의 장소였다. 뒤로는 2000 미터가 넘는 몬테발도가 있는 험악한 산이 버티고 있으니 적군이 침입할 통로는 오직 가르다 호수뿐이다.

당시로서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대부분의 유럽 나라들이 영주 중심의 국가 형태였을 것을 고려한다면 작은 도시 간에 침략이 흔했을 것이다. 세로로 길게 펼쳐진 호수변에는 동네들이 즐비했는데 말체시네 건너 리모네까지는 배로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말체시네나 리모네처럼 2000~3000명이 집단을 이루어 조성된 동네들이 호수변에만 적어도 수십 개가 있다.

리모네에서 배를 타고 돌아오면서 말체시네 성채를 집중적으로 관찰을 했다. 성채가 없는 말체시네는 무엇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을까? 동네 중심에서 당당히 깃발을 나부끼는 그의 위용에 역사의 순간마다 말체시네와 가르다, 넓게는 이탈리아의 운명과 함께했을 험난했던 시간을 상상해 보았다.

나는 성채에서 수십 장의 사진을 찍어 댔지만 험상궂은 경비원이나 행정관 혹은 경찰관 등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누구한테 어떤 제재도 받지 않았다. 모두 괴테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그레고리오로 여겨질 사람들뿐이었다. "혹시나 나를 스파이로 오인한 사람은 없겠지?" 괜히 괴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아니 나를 스파이로 오인하여 괴테처럼 간단히 구금이라도 된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했던 것처럼 내가 왜 이탈리아에 왔는지, 이곳 말체시네와 가르다에서 느낀 점은 무엇인지와 같은 나의 감상평들을 군중 앞에서 장황하게 펼쳐 놓을 수 있을 텐데, 은근히 이런 생각도 했다.

말체시네 성과 항구. 이 성은 15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스케치만 했던 괴테를 감금하려 했던 당시의 성채와 지금의 그 모습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괴테가 남긴 스케치에 그때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기에 현재의 모습과 쉽게 비교할 수 있었다. 단지 그는 갔고 나는 아직 여기에 있을 뿐이다.

그가 만났던 호수의 풍랑도 잔잔하기만 했다. 세월이 더 많이 지난다 하더라도 성채는 크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갔듯이 나도 가고 오늘 왔던 많은 사람도 가고 없을 것이다. 또 누군가의 오해를 낳고 오해를 풀 듯이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험상궂은 사내도 만나고 그레고리오도 만나게 될 터이다.

저녁 8시에 맞춰 망루의 쇠 종소리가 말체시네 앞 호수를 흔들어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약한 조명이 성채를 비추자 성채는 잔잔한 호수에 내려앉았다. 바람이 차다. 옷깃을 여미어야 한다.

말체시네 성에는 괴테기념관을 마련해 놓았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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