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 타계 10주기
생전 이야기 꺼낸 문인들
하동·통영서 추모 문학제

억척스럽게 바람이 불던 4일 오후, 하동 박경리문학관 마당에서 열린 '큰 작가 박경리 선생 타계 10주기 문학제'. 박경리 선생 동상을 비추던 해가 기울어 마당에 그늘이 질 무렵 유족 대표로 딸인 토지문화재단 김영주(72) 이사장이 무대에 올랐다. 김 이사장의 남편이자 선생의 사위 김지하(77) 시인이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 있다.

"이상하게 오늘 자꾸 눈물이 나네요. 제가 늙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2008년 5월 5일 서울아산병원에서 어머니가 눈을 감고 영안실로 갈 때 한 번 크게 통곡한 후 10년 세월동안 눈물 한 번 나지 않더라는 김 이사장. 그의 눈물은 다음 날(5일) 통영 박경리추모공원에서 열린 '박경리 선생 10주기 추모제'에서도 계속됐다. 하루 사이 나름 생각을 했는지 통영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정도 어머니에 대한 추모나 이런 것들이 다 자리가 잡히고, 또 어머니에 대해 오해했던 것들이 다 사라지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어머니의 모습들이 정착되어 가고, 어쩌면 그런 것들이 저를 눈물 흘리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동 박경리문학관에 있는 선생의 생전 사진. /이서후 기자

박경리 선생 타계 후 10년. 추모 사업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는 생각에 김 이사장은 이제야 진짜 어머니를 떠나 보내는 듯하다. 수식어가 따로 필요 없는 한국 문단의 큰 작가. 하지만, 김 이사장에게 선생은 삶의 엄혹한 고난을 묵묵히 견디며 생계를 꾸려온 어머니였던 것이다.

"행복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동 추모제에서 한국작가회의 이경자 이사장(소설가)이 회고한 선생의 한마디다. 그의 문학을 낳은 고난의 시작은 소설 <불신시대>(현대문학 1957년 8월호)에 잘 나타난다. 한국전쟁 시기 남편을 잃고, 세 살배기 아들마저 저세상으로 보낸 선생은 친정어머니와 딸 하나를 데리고 서울 정릉에서 힘겹게 살아간다. 작가 이전에 그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던 가장이었다. 하동 추모제에서 김일태 경남문인협회 회장(시인)이 박경리 선생의 3가지 보물로 소목장, 국어사전과 함께 소개한 재봉틀이 이를 상징한다. 재봉틀은 글로 돈을 못 벌 경우 마지막 생계수단으로 간직했다.

전쟁이 끝나고도 고난은 이어졌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 사위는 서대문형무소에 있었고 우리 식구는 기피 인물로 유배지 같은 정릉에 살았다 천지 간에 의지할 곳 없이 살았다 수수께끼는 우리가 좌익과 우익의 압박을 동시에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만큼 추악해질 수 있는가를 뼈가 으스러지게 눈앞에서 보아야 했던 세월 태평양전쟁 육이오를 겪었지만 그런 세상은 처음이었다 악은 강렬했고 천하무적이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박경리 유고시집, 마로니에북스, 2008)

5일 통영 박경리기념관 시비 제막식. /이서후 기자

소설가 김훈은 1994년 수필을 통해 1975년 2월 15일,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다시 형집행정지로 사위 김지하 시인이 풀려나던 날, 추운 밤 겨울바람 속 교도소 정문 건너편 언덕 위에서 생후 10개월 된 손자를 업고 사위를 기다리던 박경리 선생의 모습을 회고했다. 당시 신참기자 김훈 이외에는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날 박경리 선생은 <토지>를 연재하고 있는 유명한 소설가가 아니라 자식을 걱정하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하동 추모제에서 정호승 시인이 낭독한 추모시도 '어머니'란 단어로 시작한다. 정 시인은 선생을 문학의 어머니로 여겼다.

5일 추모제에 참석한 선생의 사위 김지하(맨 왼쪽) 시인과 딸 김영주(가운데)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이서후 기자

"어머니 당신은 어디에 계시온지요 토지라는 영원한 질문과 토지라는 영원한 해답을 주신 어머니 (중략) 당신의 품 안이 그리워 저희들은 맨발로 달려가는데 어머니 당신은 어느 하늘의 토지에 계시온지요" (정호승 <지금은 천국의 토지를 집필하고 계시온지요> 중에서)

5일 오전 통영 박경리기념관 마당에서는 선생의 시 '삶'을 새긴 시비 제막식이 열렸다.

'나의 출생은 불합리했다'로 시작한 선생의 삶은 고통스러운 '불신시대'를 견디며 작가로서도, 어머니로서도 위대해졌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피운 생명과 사랑의 큰 꽃이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란 마지막 시어로 남아 그 곁 선생의 동상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4일 추모시를 낭독하는 정호승 시인. /이서후 기자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