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들 그 멋스러움
일곱 바위라는 뜻의 칠암동
유유히 걸으며 옛정취 만끽
농지·담벼락 야생초 '인상적'
개교 100주년 넘은 과기대
오래된 역사와 전통만큼
우람한 플라타너스 나무들

진주시 칠암동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에서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아트홀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딴에는 가깝다고 생각해서 걸어가는데 가도 가도 대학 교정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결국, 지도 앱을 열고 살펴보니 엉뚱한 방향으로 왔더군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동네나 둘러보자며 여유롭게 걷기 시작했습니다.

칠암동은 한자로 '七岩(칠암)'이라 씁니다. 일곱 바위란 뜻이죠. 옛날에 경상대 의대와 경남과기대(옛 산업대) 사이에 큰 바위가 일곱 개 있었답니다. 바위가 있던 곳은 '치리미'라고 불렸고요. 지금 이 바위는 사라지고 없고 칠암이란 동네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아, 과기대 안에 칠암동천이라고 칠암동 바위를 형상화한 곳이 있긴 합니다.

칠암동이란 이름도 1949년에 얻은 겁니다. 이전에는 천전동, 천전리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천전(川前)이란 남강 앞에 있다는 뜻입니다. 천전동이란 이름은 지금도 망경동, 강남동, 칠암동, 주약동을 담당하는 행정동 이름으로 쓰고 있습니다.

진주 칠암동 골목의 낡은 술집.

원래 칠암동 남강변에 나루터가 있었습니다. 치암이 나루터라고 불렸답니다. 나루터는 1969년 진양교가 생기면서 없어집니다. 원래 강을 건너던 곳인데 다리가 생기니 있을 필요가 없어졌죠. 진양교는 과기대 정문에서 진주시청 방향으로 갈 때 반드시 건너야 하는 다리입니다.

칠암동 지역은 그야말로 시골이었습니다. 아마 1987년 경상대 의대 부속병원이 생기고 이듬해 경남문예회관이 건립되면서 동네가 거듭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대학 교정도 있고, 대학병원도 있고, 도 단위 문화시설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격변이었겠지요.

걷다 보니 농지가 나옵니다. 도심 속에서 만나기엔 뜬금없이 넓습니다. 마늘인지 파인지 모를 작물들이 자라고 있네요. 여전히 저는 밭에서 자라는 마늘과 양파와 파를 확실히 구분하지 못합니다. 농지 너머로 주택가가, 다시 그 너머로 구름 낀 하늘이 보입니다. 마치 칠암동의 역사가 전부 담긴 풍경 같습니다.

저편에 옛 진주역 차량정비고가 보이네요. 과기대로 가려면 이즈음에서 제대로 방향을 잡고 걸어야겠습니다.

칠암동은 현재 원룸촌이 빽빽하게 들어서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칠암동에 살다가 이런 모습이 싫어 이사를 하였습니다. 인류문명사에서 도시는 반전통과 변화의 온상이었습니다. 다양한 자극과 생각이 부딪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도시에서는 인류발전을 이끈 그 '반전통과 변화'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도시가 지나치게 크고 획일화된 탓이기도 하겠지요.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도시 문화를 거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겠고요. 하지만, 칠암동에는 여전한 옛 풍경이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길가 화분에서 자라는 한 송이 유채꽃이 그렇고요, 상추가 앙증맞게 자라던 어느 작은 텃밭이 그렇습니다. 아스팔트 도롯가 담벼락 아래 촘촘하게 이어선 야생초들이 또 그렇습니다.

길가 화분에 핀 유채꽃 한 줄기. 안간힘을 쓰며 오랜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것들.

오랜 것들의 가장 강한 버팀목은 경남과기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100년 역사를 증명하는 교정 안 우람한 나무들 이야깁니다.

옛 진주역에서 방향을 제대로 잡고 걷다 보니 메타세쿼이아 길이 나옵니다. 경남과기대 후문입니다. 길은 좁고 메타세쿼이아들은 아주 커서 독특한 풍경입니다. 과기대 학생들은 이곳을 쥐라기공원이라고 부릅니다. 잎이 다 자라면 300m 메타세쿼이아 녹음이 마치 공룡이 살던 시대에 온 것처럼 깊고 높아서 그렇답니다.

도심 속 작은 텃밭.

경남과기대는 칠암동에 자리 잡은 오랜 학교입니다. 1910년 진주공립실업학교로 시작했고요, 1979년 진주농림전문대학으로, 1993년에 4년제 진주산업대학교로 바뀝니다. 연세가 있으신 분이라면 진주농대, 중장년이라면 산업대란 이름이 더 익숙할 겁니다. 경남과학기술대학교란 이름은 2011년부터 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산업 말고도 인문사회과학대학, 상경대학 등 다양한 분야 학과가 있습니다.

교정에 들어서고도 아트홀이 있는 100주년기념관이 어느 방향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뭐 어떻습니까. 또 이렇게 된 거 여유롭게 교정을 걸어보는 거지요. 그러다 만난 것이 어느 스님의 흉상입니다. 뭐지? 가까이 가서 보니 '청담대종사선시비'라고 적혀 있네요. 청담이란 큰스님이 지은 선시를 새긴 비석이란 뜻입니다. 청담 스님(1902~1971)은 해방 후 불교정화운동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합니다. 당시 불교정화운동이란 일본전통의 대처 승단에서 한국 전통의 독신 승단을 복원하겠다는 겁니다. 돌아가시기 전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까지 지내셨지요. 이분이 경남과기대 전신 일제강점기 진주농업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경남과기대 100주년기념관과 플라타너스. 교정에는 엄청나게 큰 플라타너스가 많다.

'마음의 노래'란 선시에서 다른 부분은 모르겠고 마지막 '꽃을 보고 기뻐하는 것보다도/꽃을 피워 놓고/남을 기쁘게 하는 마음/이것이 곧 자비의 마음씨다'란 부분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좀 했습니다.

어찌어찌 방향을 잡고 걸으니 마침내 아트홀이 있는 100주년기념관이 보입니다. 그러다 문득 발걸음이 멈췄는데요, 갑자기 눈에 들어온 플라타너스들 때문입니다. 과기대를 몇 번 찾긴 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풍경입니다. 새삼 엄청난 크기입니다. 위세가 교정에 우뚝 선 100주년기념관에 뒤지지 않습니다. 모습 그대로 플라타너스는 경남과기대의 꼿꼿한 역사이자 묵직한 전통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하염없이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봄날은 푸르고, 교정에는 싱싱한 젊음이 바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눈빛이 아련해집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