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3월 2일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에 <오늘의 세계인물>로 근대 일본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가 실렸다. <오늘의 세계인물>은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스포츠 등 각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을 선정해 그들의 일생을 소개하는 코너다.

그러자 하필이면 3·1절 다음날에 한국을 병탄한 인물을 위인으로 소개한 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특히 이 기사는 그 뒤로도 매년 삼월이면 심심찮게 등장해 많은 한국인들을 자극하곤 한다. 적어도 한국에서 그는 안중근 의사의 총에 쓰러진 '일제(日帝) 식민지배 원흉'이기 때문이다. 그럼 일본에서는 어떨까? 공과에 대한 논란은 많을지라도 이토 히로부미가 근대 일본을 설계한 '원훈(元勳·나라를 세운 으뜸가는 공로자)'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다. 한일 양국에서 이처럼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을 또 찾을 수 있을까?

이토는 메이지 유신으로 상징되는 일본 근대화를 이끈 중추적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개인적으로는 신분 상승을 통해 야망을 실현한 '자수성가'형 정치가다. 30년 동안 권력의 중심에서 유럽 열강과 맞서며 일본과 동아시아를 요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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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 히로부미.

한국 통감을 끝으로 이토는 마지막 길이 되는 만주여행에 나선다. 이 여행을 주선한 고토 신페이는 세계 무대에서 대(大)아시아주의를 선양하려면 이토가 나설 수밖에 없다며 이렇게 말한다. "서태후를 비롯한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을 설득하고, 동양권의 연대를 이끌어내려면 '불출세의 위재(偉才)이자 한 세대를 압도하는 성망(聲望)'을 지닌 이토 공이 나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공직도 맡지 않은 채 오직 한 사람의 경세가로서 대륙과 유럽을 만유하면서 열국의 준걸들과 손을 잡고 세계 대세를 토론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불출세니 위재니 하는 옛날식 한자가 낯설기는 하나 그 뜻은 '위대하다'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고토의 말 속에 다소 '교언영색' 적인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위재와 성망이란 단어를 써가며 한 개인을 이처럼 서슴없이 찬양했다는 건 당시 대체적인 평가가 그랬다는 걸 의미한다.

이런 평가가 나오게 된 배경을 돌아보자. 유신 삼걸(三傑) 중 하나인 기도 타카요시를 보좌하면서 정치에 발을 내디딘 이토는 구미 각국을 돌아본 경험을 토대로 근대화 시책을 주도하면서 입지를 굳힌다. 삼걸이 사라진 후에는 중신으로 우뚝 선 상태에서 대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하는 수훈을 세운다. 청일 전쟁과 전쟁 후처리를 통해 일본이 국제적인 위치를 굳히는 데에도 협상가로서 그가 세운 공은 단연 으뜸이었다. 초대 통감으로서 한국 병탄의 밑그림을 완성한 것도 이토다.

이 같은 성취는 일본인들이 지금도 자랑하는 바다.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토가 직접 한 말을 들어보자. "사람은 누구나 지위가 높은 선배가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내가 처음 내각에 공부경(工部卿)으로 들어갔을 때 산조, 이와쿠라, 기도 등 여러 사람들이 내게 기대한 것은 적시에 필요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장래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안에 대해 충분히 조사하여 대안을 준비해뒀다가 필요할 때 그들에게 제시하곤 했다. 이런 일이 두 번 세 번 반복되다 보니 드디어 중요한 정무에 참여하게 되었다."

메이지 시대 언론인인 도쿠토미 이치로는 "일을 잘 처리하고 말을 잘하여 오쿠보 도시미치(유신 삼걸 중 한 명)조차 하루도 이토 없이는 일을 꾸려 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 중에 메이지 일왕이 들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늘 한 걸음 앞서서 장래를 구상하고, 대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지칠 줄 모르고 학습에 매진한 결과였다. 이토는 술과 여자를 제외하고는 독서와 한시(漢詩)만이 유일한 취미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영국 유학에 나서는 아들에게 한 말은 그가 터득한 '인생과 학습'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증거다.

"학문은 읽는 학문도 중요하지만 듣는 학문도 필요하다. 인간은 살아있는 책이기 때문에 서양에 가면 사람들과 많이 접촉해 식견을 넓혀라. 누구와 만나 어떤 문제를 토론하더라도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일에는 반드시 겉과 속이 있으므로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넓고, 깊게, 사물의 표리를 통찰해 제대로 통하게 하는 것이 안목이다. 관찰을 정밀하게 하는 것이 서양인의 특색이고, 조잡한 것이 동양인의 약점이다."

이토는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 인간과 사물에 내재된 다양한 측면을 아우르는 기예(技藝)를 완성했다. 중국 병법서가 늘 강조하는 '임기응변' 능력이 그것이다. 화전(和戰) 양면을 넘나드는 이 같은 개성은 국내 정치판에서는 생존을, 국제 정치판에서는 승리를 그에게 안겨주었다.

그래서일까? 이토는 자신이 밑바닥 신분에서 총리 자리에 오른 것을 두고, 주군의 신발을 정리하는 미천한 신분에서 천하를 통일하고 최고위 직책인 관백(關白)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비교하는 데 대해 "히데요시는 무학(無學)인 일개 호한(好漢)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평생을 학습을 통해 파격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협상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자신을, 천하를 통일했다고는 하나 일개 무반(武班)에 불과한 히데요시와 비교하지 말라는 오만한 말이기도 하다.

외견상 메이지 시대에 이토를 능가한 정치가는 없다. 그렇다면 화려한 정치 경력을 지탱한 철학은 어땠을까? 당대가 지닌 한계 때문이겠지만 그는 전형적인 '왕권론자(王權論者)'였다. 메이지 일왕에게 그가 바치는 절절한 헌사는 지금도 일본 극우 인사들을 자극할 정도다. 그런가 하면 앞선 제도와 무력을 지닌 서양 열강을 따라잡는 것을 지상목표로 설정한 '근대화주의자'였다. 특히 후자는 동시대 다른 정치가들과 비교하더라도 유별날 정도였다.

거기다 오로지 현실정치와 권력에 골몰한 관계로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대중적인 신망(信望)은 그리 높지 않다. 메이지 유신 공로자 중 젊은 나이에 암살당한 사카모토 료마나 반란을 일으켰다 자결한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아직까지 후세들로부터 열렬한 추앙을 받고 있는 반면 이토는 고토 신페이가 말한 것과는 달리 '재주 많은 현실 정치가'였을 뿐이라는 평가다.

이토는 부국강병책에 몰두하면서 지나친 외국경도에 반발하는 이들을 조소하고 억눌렀다. 일왕을 둘러싼 사람들이 이토가 주도하는 지나친 열강 친화정책을 공격하자 산조 사네토미에게 보낸 글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시종장과 유학 스승은 훌륭한 사람이지만 그들은 세계정세에 어둡고 급한 일과 득실을 가릴 줄 모른다. 그런 자리에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 책임을 지는 입장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형세가 얼마나 어렵고 위급한지는 동서고금에서 그 유례를 보기 힘든데, 만일 방향을 잘못 잡고 처치를 제때 하지 못하면 국가 존망이 걸리게 마련이다."

시세가 급박했던 당시로써는 보수 세력에 대한 이런 일갈이 의미 있어 보인다. 이토를 일견 '후진국을 견인하려는' 경세가(經世家)처럼 보이게도 한다. 하지만 이후 일본제국을 조망했을 때 이토와 같은 열강 일변도 정책이 엄청난 부작용을 유발했음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청일 전쟁, 러일 전쟁을 통해 열강의 반열에 오른 일본은 성공에 도취해 계속 그 관성을 유지했다. 전쟁을 통한 이권 쟁탈은 국가적 목표가 되었다. 국제사회로부터 이제 열강 대열에 접어든 만큼 책임 있는 주요 국가로 행동해줄 것을 요구받았으나, 그저 열강 따라잡기에 몰두했을 뿐인 그들에게 타국과 공존하는 '평화철학'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 귀결은 참혹한 희생을 동반한 패망이었다.

문명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일본의 지배 엘리트들이 열강에 경도된 이유를 철학 부재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계적으로 출중한 일본의 내셔널리스트들은 항상 다른 나라가 이런 일을 하니까 거기에 맞서 우리도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래서 일본 최초의 학술단체인 명육사(明六社) 회원이었던 니시무라 시게키는 당시에 이토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이토 내각이 주도한 야회(野會)나 가장무도회는 서양 유희를 흉내 내는 것으로, 모두 외국인의 환심을 사는 일이었다. 고래로 일본 국가의 기초를 이루던 충효, 의리, 무용, 염치 등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던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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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3년 도쿄에 세워진 향락시설 로쿠메이칸.

도쿄에 로쿠메이칸(鹿鳴館)이라는 향락시설이 세워지자 일본 정부는 이를 기념하는 성대한 무도회를 열었다. 일본인들은 이 무도회를 통해 일본 사람도 유럽인들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걸 과시하고 싶었다. 이토는 그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값비싼 외국 의상으로 몸을 감싼 일본 남녀를 우스꽝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프랑스 화가 조르주 비고의 풍자 만화 중에 거울 앞에 선 한 쌍의 남녀를 그린 것이 있다. 여자 머리는 거대한 투구처럼 높고 빳빳하게 풀이 먹여져 있고, 타조 깃털이 꽂혀 있다. 스커트를 받쳐주는 페티코트와 양산을 보면 최신 유행하는 파리 패션이다. 상대방 남자 콧수염은 밀랍으로 고정되었고, 손에는 비단으로 만든 중절모가 들려 있다. 하지만 우아하게 맞춰진 윗도리 밑으로 뻗은 다리는 성냥개비 같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영락없이 한 쌍의 원숭이다. 도쿄 한복판에서 개최된 최초의 유럽식 무도회는 그야말로 원숭이 흉내 내기 같은 것이었다. 이 천연덕스러운 흉내 내기는 지나가던 외국인에게는 그지없이 재미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 이 나라 국민들에게는 취미가 없다는 사실, 국민적 긍지가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걸 드러내는 것일 뿐이었다." 역사가 도널드 킨이 던지는 냉정한 지적이다.

이토와 이노우에 가오루가 주도한 로쿠메이칸 파티로 일본이 유럽 열강과 대등해졌다고 믿는 외국인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그들은 '일본인은 독자적인 문화 대신 중국이나 서양 문화를 빌리고 모방하는 민족일 뿐'이라고 평했다.

이런 현시적인 정책은 당시 정치 기조였지만 실은 이토를 비롯한 정치가들의 '허약한'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메이지 헌법을 둘러싼 정치와 제정과정을 심도 있게 연구한 조지 아키타는 "출신이 미천한 이토는 자신의 외양을 권위적으로 치장하기 위해 자기현시적인 명예나 위계, 또는 훈장과 같은 것에 병적으로 집착했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이케베 산잔이란 이는 "훈장을 만든 사람도 이토 공이고, 귀족을 만든 사람도 이토 공이다. 즉 이토 공은 명예를 표창하는 기구(器具)를 많이 만들었고, 또한 자신이 가장 많이 취했다"고 평했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자신을 비스마르크와 대등한 정치가로 과시했다. 그러나 세평은 그를 "술에 취했을 때는 미인의 무릎 사이 깊숙한 곳에 묻혀 있다가 깨어나서는 천하의 권력에 몰두하는 정치인"이라고 했다.

이케베는 이토를 지혜재각(智慧才覺)의 정치인이긴 하나 이 지혜재각이라는 것이 때와 장소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일관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지적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을 근대국가로 만든 이들이 실은 국가를 운용하는 큰 틀,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철학을 지니지 못했으며, 그것이 종국에는 불행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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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삽화.

이토는 마지막까지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젊어서는 유신 삼걸이 다들 일찍 꺾이는 바람에 정치 중추가 될 수 있었고, 늙어서는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에 목숨을 잃는 행운(?)을 누렸다. 와석종신(臥席終身)을 두려워하던 당시 지도층들은 "이국에서 총을 맞고 흉사하다니, 이 얼마나 멋진 최후인가"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라이벌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군인인 노기 마레스케도 모두 그를 부러워했다.

장례는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5000여 명이 참여하는 국장으로 마무리됐다. 이토가 일평생 추구한 '열강에의 꿈'은 그를 비롯한 원로그룹이 사라지자 군부가 주도하는 '목적 없는 폭주(暴走)'가 되고 말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살았던 시대는 분명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격변기였다. 이토는 당시 정치가들을 대표하여 30년 넘게 그 중심에 있었으나, 그런 격변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일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참고도서

- 한상일,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까치

- 이종각, <이토 히로부미, 원흉과 원훈의 두 얼굴>, 동아일보사

- 도널드 킨, <메이지라는 시대> 서커스

- 우치다 타츠루, <일본 변경론>, 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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