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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추적 이은상] (6) 낙동강에서 만난 윤이상과 이은상

전점석 마산역사문화유산보전회 운영위원 jjseuk@tistory.com 입력 : 2018-05-01 13:59:47 화     노출 : 2018-05-01 14:11:00 화

첫 번째 휴전선 종주를 하고 온 이은상은 1965년부터 한국청년운동협의회 회장으로 무려 17년간 있으면서 반공청년운동을 죽을 때까지 열심히 하였다. 반공청년들과 함께 하는 여러 행사에서 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 바치자는 북진통일을 강조하여 많은 감동을 주었다. 두 차례나 휴전선을 종주한 이은상은 절절한 나라 사랑을 담은 시조 '고지가 바로 저긴데', '나의 조국 나의 시',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 '기원' 등을 썼다. 한편 휴전한 지 3년이 지난 1956년,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이듬해인 1957년 독일로 옮긴 윤이상은 세계적인 작곡가가 되었다. 그는 남북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분단의 희생양, 독재 권력의 국면전환용이라는 동백림사건으로 투옥되어 징역을 살기도 했다. 윤이상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히', 북한국립교향악단이 초연한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작곡하였다. 노산이 과거에는 북진통일이었지만 시대가 변하였으니 만약 지금 살아있다면 평화통일, 남북교류를 주장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능성은 희박하다. 왜냐하면 그가 죽을 때까지 이끌었던 반공우익단체는 지금도 북진, 멸공 통일만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분은 조국의 통일에 대해서는 같은 마음이었지만 방법론은 전혀 달랐다. 극과 극이었다. 나이는 이은상이 1903년생이고, 윤이상이 1917년생이니 14살 차이였다. 이 두 분이 6·25전쟁 시기에 부산에서 만나 작사, 작곡한 노래가 그 유명한 '낙동강'이다.

이은상과 윤이상이 만든 영화 <낙동강>의 주제곡

노산은 서울에 있다가 6·25전쟁이 발발한 후인 1951년 1월부터 1년간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같은 해에 부산향토문화연구회가 나서서 경상남도 후원으로 감독 전창근, 제작 김재문, 각본편집 전창근, 배우 이택근, 최지희가 출연하여 기록영화 <낙동강>을 만들었다. 이 영화의 삽입곡을 이은상이 작사하고, 윤이상이 작곡하였다. 윤이상은 부산사범학교 교사였다. 당시 경상남도 문화계장이었던 서양화가 우신출이 진행과 기획을 담당하였다. 1952년 2월 부민관에서 개봉했다. 각급 학교 강당에서도 상영되었다. 꽤 오랫동안 노래 '낙동강'을 모르면 경남도민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많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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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국제음악당 뒤 바다가 보이는 곳에 마련된 윤이상 묘역. 올해 통영국제음악제는 윤이상 귀향으로 한층 의미를 더했다. /통영국제음악재단

 

보아라 가야신라 빛나는 역사

흐른 듯 잠겨있는 기나긴 강물

잊지 마라 예서 자란 사나이들아

이 강물 네 혈관에 피가 된 줄을

오! 낙동강, 낙동강

끊임없이 흐르는 전통의 낙동강

 

산 돌아 들을 누벼 일천 삼백리

굽이굽이 여흘여흘 이 강 위에서

조국을 구하려는 정의의 칼로

반역의 무리들을 무찔렀나니

오! 낙동강, 낙동강

소리치며 흐르는 승리의 낙동강

 

두 언덕 고을고을 정든 내 고장

불타고 다 깨어진 쓸쓸한 폐허

돋아오는 아침 햇빛 가슴에 안고

나가라 네 힘으로 다시 세우라

오! 낙동강, 낙동강

늠실늠실 흐르는 희망의 낙동강

 

흑백으로 된 다큐멘터리 영화 <낙동강>을 만든 부산향토문화연구회는 양성봉 경남도지사의 후원으로 한형석을 비롯해 화가 우신출, 사진작가 김재문, 시조시인 이은상, 음악가 윤이상, 금수현 등의 문화예술인들이 만든 단체이다. 첫 사업인 영화의 주제곡으로 쓴 이은상의 시 '낙동강'을 윤이상에게 작곡의뢰를 하였다. 이 노래는 당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작품이었다.

1945년 말에 부산 음악가와 음악교사 모임인 경남음악협회(나중에 부산음악교육연구회로 바뀜)가 창립되었는데 회장은 금수현이었으며 윤이상도 참여하였다. 1949년에는 부산의 연주가들을 중심으로 부산음악가협회가 창립되었는데 간사장은 정복갑이었고 정회원인 윤이상은 작곡부 간사였다. '낙동강'은 일종의 전시가요인데 민요조로 빠르게 부르는 힘찬 가락이다. 요즈음도 60여 년 전 중학교 시절에 배운 이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초등학교 때 학교 운동회를 하면서 기마전을 할 때 부르기도 했다. 진의장 전 통영시장은 이 노래가 '경남도민의 노래'처럼 불렸다고 한다. 마산의 영화전문가 이승기 선생은 경남지역 학교에서 아침 조례 때마다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자신은 통영 충렬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학교에서 거의 매일 불렀던 낙동강을 지금도 외우고 있다. 마산의 작곡가 고승하 선생은 1960년대 초반 중학생 시절에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는 부산시 강서구 대저면에 있는 낙동중학교를 다녔었다. 두 가지가 있었는데 교과서에는 김동진이 작곡한 행진곡풍의 낙동강이 실려 있었고 민요풍의 낙동강은 윤이상 작곡으로 기억하고 있다. 자진모리와 굿거리장단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윤이상이 작곡했다는 이유로 '낙동강'은 금지곡이 되어 지난 반세기 동안 전혀 들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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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상의 낙동강 시비.

가사는 조금 다르지만 이은상의 시 '낙동강'에 한수성이 작곡한 동요가 있다. 2010년, '윤이상기념관'이라는 제 이름을 갖지 못한 채 '도천테마기념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식을 할 때 경남대 정일근 교수가 '이 집에 윤이상 선생이 살고 있다'는 헌시를 낭독했고 통영 시립소년소녀합창단이 동요 '낙동강'을 합창했다. 최근에는 동요 '낙동강'이 윤이상동요제 등을 통하여 꽤 많이 알려졌다.

처절했던 낙동강 전투를 생각하며 쓴 '낙동강'

'낙동강'을 쓴 노산은 6·25 전쟁 중에 가장 치열했던 경북 칠곡군 낙동강 전투를 생각하며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희망의 낙동강'을 노래했다. 낙동강 전투는 그야말로 치열하였다. 1950년 8월 1일 미군 워커 중장은 워크라인이라는 낙동강 방어선을 설치했다. 이에 따라 8월 3일 왜관 전 주민에게 소개령이 내려졌고 낙동강 방어선의 교량도 모두 폭파되었다. 8월 16일 인민군 4만여 명이 집결하여 대규모 도하작전을 시작하였고 워크 중장은 일본에 있는 맥아더 원수에게 융단폭격을 급히 요청했다. 이 요청에 따라 일본에서 출발한 비행기 B29, 98대가 왜관 서북방 67㎢에 26분 동안 90t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 폭격으로 인민군 4만 명 중 3만 명이 죽었다. 1초에 20명, 1분에 1,150명이 폭사하였다. 이 융단폭격으로 인민군 제3군단의 병참기지이자 사령부가 있던 약목역(약목면 복성리) 근처는 초토화되었다. 당시 인민군 야포의 사정거리는 20km인데 왜관에서 대구까지의 거리가 25km였다. 왜관이 점령될 경우 이곳에서 10km 후방인 도덕산까지 인민군이 장악하면 대구가 위험해지고 대구가 점령되면 부산까지 위험해진다는 판단에 의해 유엔군은 필사적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려 한 것이다. 피로 물든 낙동강이었다. 윤이상과 이은상은 '낙동강'을 합창곡으로 만들어 전쟁 중인 젊은이들에게 조국 수호의 의지를 고취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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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에 있는 ‘윤이상과 학교가는 길’ 안내판.

당시 작곡가 윤이상은 이은상뿐만 아니라 박목월의 '나그네', 김상옥의 '그네', '편지', 조지훈의 '고풍의상'도 작곡했다. 윤이상은 1952년에는 박태현, 나운영, 김성태, 윤용하, 김세형, 이흥열, 김동진, 김대현 등이 참여한 전시작곡가협회(나중에 한국작곡가협회로 바뀜)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전시가요와 전시동요를 작곡하여 보급하다가 다시 부산사범학교 교사로 복직하였다. 전쟁 기간 동안 윤이상은 많은 동요를 작곡해 우리나라 아동 음악교육에 매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아동문학가이자 동요작가인 김영일과 함께 동요를 썼다. 이 곡들을 포함하여 1952년 문교부 검인정의 학년별 음악교과서인 <국민학교 새음악>을 발간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여섯 권으로 되어있으며 전시작곡가협회 회원들의 동요 101곡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윤이상이 작곡한 동요는 55곡으로 절반이 넘는다. 그리고 전시 초등학교 노래책 <소년기마대> 1권에도 수록되었다. <소년기마대>는 김영일이 작사한 동요에 윤이상이 곡을 붙여 펴낸 공동저서이다. 김영일은 일제시대 친일활동을 한 작가이다. 일제시대 1944년 징용에 걸려 미곡창고에서 일하던 중 반일혐의로 체포되어 두 달간 투옥되었던 윤이상이 '애국기 소국민호'라는 동시로 애국기 헌납을 위한 국방헌금 참여를 찬양한 친일파 김영일과 함께 동요를 지었던 것이다. 전쟁 당시 결성된 전시작곡가협회의 작곡가들이 곡을 붙여 만든 전시 동요집 <소년기마대>와 문교부 인정필 <국민학교 새음악> 6권에 수록된 악곡 전체의 글이 김영일의 작품이다.

이은상의 시에 곡을 붙이는 작곡가도 더 있었다. 윤이상 외에도 동요 '달 따러 가자', '태극기'와 '한글날 노래', '3·1절 노래'를 작곡한 박태현은 노산의 '바다는 부른다', '낙동강' 등을 작곡하기도 했다.

낙동강 시비가 2개 있는데 하나는 1978년에 개관한 칠곡군 석적읍의 왜관지구 전적기념관 앞에 있고 또 하나는 부산시 강서구 대저2동 동구마을 앞 강둑에 1992년 강서구청이 세웠다.

49년 만에 고향, 통영으로 돌아온 윤이상

지난 2017년 7월 5일, 네이버 실시간 인터넷 검색어 1위에 윤이상이 올랐다.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독일 가토우 공원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윤이상 선생 묘지를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뜻깊은 일이었다. 1969년 독일로 추방된 후 한 번도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1995년 세상을 떠났다. 최근에도 2005년 설립된 윤이상평화재단은 박근혜 정부에서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고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일지에서도 '윤이상 방북'이라는 메모가 남아 있었다. 유네스코 산하의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WFIMC)에 가입한 한국의 첫 국제 콩쿠르인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도 정부 지원 중단으로 무산될 뻔했다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가까스로 예산을 배정받았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서 외무부와 통영시의 노력으로 윤이상의 유해가, 석방되어 돌아간 지 49년 만에 고향 통영으로 왔다. 2018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일인 3월 30일에 유해를 안장하려고 했으나 보수단체들이 시끄럽게 할까 봐 날짜를 앞당겨서 20일, 생전에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늘 푸른 통영 바다가 보이는 음악당 뒤의 동쪽 바닷가 언덕에 봉분 없이 자연장으로 유해를 안장했다. 98㎡ 정도의 자그마한 크기이고 너럭바위와 1m 높이의 작은 동백나무와 해송이 심어져 있었다. 묘소임을 알리는 작은 너럭바위에는 더러운 곳에 처해 있어도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항상 맑은 본성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맑고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나 세상을 정화한다는 뜻의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사자성어를 음각으로 새겨 놓았다. 1995년, 윤이상이 죽고 난 후 49재를 지내려 독일을 찾은 설정 스님(현 조계종 총무원장)이 묘비에 직접 쓴 글씨이다. 베를린 가토 공원묘지 비석에도 적혀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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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통영시 도천동 윤이상기념공원에 선생의 귀향을 환영하는 푸른 리본을 달았다. /경남도민일보DB

필자는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식이 열리는 3월 30일 오후 1시쯤 음악당에 도착했다. 2시에 열리는 이장 및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도남동에 있는 국제음악당 건물 오른편에는 경찰버스 2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경찰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인데 역시나 바닷바람은 가끔씩 세차게 불었지만 춥지는 않았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벚꽃 너머로 바다가 유별나게 푸르게 보였다. 평생 잊지 못했던 통영의 색깔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확성기를 통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건물 앞쪽에서 나는 거친 목소리였다. 이미 콘서트홀로 올라가는 옥외 계단 입구에는 잠깐 동안 이들을 차단하기 위해 경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봉고차에 매단 확성기 주변에 20여 명이 모여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박근혜 무죄석방 천만인서명운동경남본부 회원들이었다. 주변에서 누군가가 창피한 줄 알아라고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흥분한 이 분들은 "유족들은 지금이라도 통영 시내에 나와서 김일성과의 관계를 밝히라"고 요구하면서 빨갱이를 통영 땅에 묻을 수 없다고 소리쳤다, 그들의 두 손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들려 있었다. 기자들도 많이 있었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성조기 시위가 나타나서 조금은 시끄럽게 하는 것이 마냥 조용한 것보다 훨씬 분단시대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칠게 고함 지르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동안 윤이상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게 한 막강한 세력이 이제는 마지막 발악을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취재진들 속에서 이성진 기자를 만났다. 조금 있으니 경남문인협회의 김일태 회장도 왔다. 묘소 앞에서는 강분예 전 회장(경남사회적기업협의회)을 만났다. 다과를 준비하여 추모객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추도식은 강분예 위원장(통영RCE 시민분과)의 헌다로 시작해 묵념, 경과보고, 약력소개, 인사말, 추모사, 유족인사, 추모시, 추모곡, 헌화로 이어졌다. 나도 헌화에 참여하였다. 모든 순서는 시종일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진행되었다. 고개를 바다 쪽으로 돌리니 하얀 돛을 단 세 척의 요트가 바다 위를 한가롭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김홍걸 상임의장(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은 "생전에 윤이상 선생은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음악은 정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부인 이수자 여사는 꿈만 같다고 하면서 "남편은 1981년,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할 때는 거의 매일 울면서 작업했고 돌아가신 1995년에 쓴 '화염 속의 천사'를 작곡할 때는 하다가 중간에 죽을까봐 조바심을 내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분신자살한 학생들을 위해 지은 교향시이다. 그는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다. 추모식이 진행되는 동안에 음악당 바로 아래쪽 바닷가에서는 납북자가족모임 회원 20여 명이 모여 '천륜어기고 살 수 있나, 이제 생사 확인하자, 제삿날이라도 알려 달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납북자 무사귀환 촉구행사를 조용히 하고 있었다.

'귀향'이라는 주제로 열린 2018년 통영국제음악제

2018년 통영국제음악제의 주제는 그의 유해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귀향(歸鄕·Returning Home)'이었다. 그의 귀향은 죽은 지 23년(1995년 사망) 만에, 1956년 유학간 지 62년 만에라는 수식어도 의미가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969년 석방되어 돌아간 독일에서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고,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었던 49년 만의 귀향이라는 의미가 크다. 추모식을 한 3월 30일 저녁 7시 30분에는 개막공연이 있었다. 첫 번째로 윤이상이 작곡한 '광주여 영원히'를 보훔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였다. 윤이상은 "보편적인 모범(Exemplum)이라 할 수 있는 이 역사적 사건(광주민중항쟁)을 넘어 이 작품이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비이자 온 세상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대한 촉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이 작품의 원제목은 라틴어로 표본, 모범이라는 뜻의 'Exemplum'이다. 음악을 들어보니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몇 번의 강한 악센트로 시작하여 절망과 희망, 죽음과 슬픔, 군인과 학생들이 등장하는 것 같았다. 발포 장면에서 총소리는 굉음 대신에 전통악기 박(拍)을 사용하였다. 음악평론가에 의하면 현악기와 목관악기가 서로 연대하고 저항하는 동안 금관악기가 때때로 으르렁대며 다른 악기와 대립하면서 아비규환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군인들에 의한 학살 후의 음산한 분위기는 티파니 소리와 함께 깨어난다. 다시 저항이 시작되어 금관악기의 사나운 폭력도 개별 음이 모여서 만들어 내는 거대한 흐름을 억누르지 못하는 지경이 된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모든 악기들이 총동원되어 힘찬 노래를 뿜어내다가 정점에서 갑자기 끝나서 관중들로부터 더 많은 박수를 받았다. 통영국제음악재단의 대표인 플로리안 리임은 윤이상이 작곡한 '가장 강렬하고 힘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다.

다음날인 3월 31일 오후 7시 30분, 국제음악당 블랙박스에서는 음악극 '귀향'이 공연되었다. 직사각형의 공연장은 입장 방향과 수평으로 양쪽에 계단식 객석이 있었고 좌우 양쪽에는 앙상블이 각각 자리 잡고 앉아서 오페라와 한국 전통가곡을 교대로 연주하였다. 가운데 긴 바닥에는 자갈이 깔려 있어서 배우들이 다닐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조용한 분위기를 깨는 절거덕 거리는 소리는 길을 잃고 헤매는 율리시스의 처절함을 느끼게 하였다. 입구 맞은편에는 간이 무대가 있고 가운을 두른 율리시스의 아내인 페넬로페가 초점 없는 눈으로 앉아 있었다. 연출자 루트거 엥겔스는 몬테베르디의 1640년 작 오페라 '율리시스의 귀환'을 바탕으로 각색하였다고 한다. 트로이 전쟁 10년의 승리와 이후 길을 잃고 헤맨 10년을 보낸 끝에 고향인 이타카라는 섬으로 율리시스는 귀향한다. 그의 집이 있는 에게해의 이타카섬은 트로이로부터 불과 500해리 떨어져 있는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길을 찾는 데 10년이 걸렸다. 그의 여정에는 괴물과의 싸움, 거센 폭풍이 있었다.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그림 '괴물'이 생각났다. 전쟁의 상처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전혀 치유되지 않았다. 기어이 운명적인 회귀공간인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신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율리시스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고민하는 페넬로페와의 갈등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진정한 고향의 의미를 생각게 한다.

다시 쓴 '낙동강', 새로운 모습으로 67년 만에 연주

4월 5일에는 '낙동강의 詩'가 공연되었다. 초연이었다. 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한스 크리스티안 오일러가 지휘하고 하노버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였다. 1악장에서는 슬픔과 통곡 그리고 두 번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 2악장의 오보에는 뱃노래 같기도 하고 상여소리 같기도 하다. 3악장에서는 밀양아리랑의 동지섣달 가사에 해당하는 선율과 굿거리장단으로 비극을 몰아내는 희망을 담았다. 그러나 나는 1951년의 영화음악을 듣지 못해서 구체적인 관련성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 노래는 처음에 6악장으로 구상했다가 작곡 도중에 '낙동강의 詩' 3악장으로 수정한 것 같다고 한다. 자필 악보(Orchestral Suite Poems of the Naktong River)의 목차를 보면 1악장 프롤로그, 2악장 황혼이 물들 때, 3악장 가배절(嘉俳節·한가위), 4악장 갈대밭, 5악장 풍년가, 6악장 에필로그 등으로 되어있는 관현악이다. 그러나 실제로 완성된 작품은 1악장 프롤로그, 2악장 낙동강의 저녁, 3악장 춤곡(舞曲)으로 되어 있다. 6·25전쟁 시기에 영화음악으로 작곡한 것을 그 후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할 때인 1956년 11월 29일에 완성한 작품을 최근에 유족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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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은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 건물 동판에 새겨진 위대한 음악가 44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44명 중 20세기 음악가는 윤이상을 포함해 단 네 명뿐이다. 윤이상은 세계가 인정하는 현대음악의 거장이다.

낙동강에 관한 노래는 장정문 작사, 이안삼 작곡의 '낙동강', 석용원 작사 최영섭 작곡의 '낙동강 칠백리'가 있지만 단연코 이은상, 윤이상의 '낙동강'이 최고다.

낙동강은 지금도 많은 문화예술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저물녘 나는 낙동강에 나가 / 보았다, 흰 옷자락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았다'는 시인 안도현의 '낙동강'이 있고, 시인 양우정은 '낙동강'에서 '낙동강은 700리 / 몇 굽이더냐 / 눈물이라네'처럼 낙동강에서 눈물을 보았다. 청마 유치환은 '겨레의 어머니여, 낙동강이여'에서 낙동강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각주

신태범의 부산문화야사 39, 음악거장 윤이상, 국제신문 2001년 2월 15일 자 / 박창희 대기자의 人香萬里1-6, 예술구국의 풍운아 한형석, 국제신문 2016년 2월 21일 자

주경업이 만난 부산을 지키는 꾼, 쟁이들 39, 구포향토사 연구가 백이성, 국제신문 2013년 10월 27일 자

<시민을 위한 부산인물사>, 부경역사연구소, 선인(2004년)

<부산음악협회 45년사>, 한국음악협회 부산광역시지회(2010년), 4쪽

박선욱, <윤이상 평전>, 도서출판 삼인(2017년), 198쪽

<2018통영국제음악제 자료집>, 122쪽

박선욱, <윤이상 평전>, 도서출판 삼인(2017년), 201~202쪽

박선욱, <윤이상 평전>, 도서출판 삼인(2017년), 602쪽

통영국제음악당 매거진 2018년 1월호, 통영국제음악재단, 4쪽

<2018년 통영국제음악제 자료집>, 122쪽

'원조 블랙리스트' 위대한 음악가를 위해, 장일호, 시사IN 2017년 7월 29일 제5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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