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우곡선생 문집> 제2편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다'는 말에는 뜻이 있다. 영 (靈)을 가진 온갖 것 중에서 인간이 으뜸이며, 그런 까닭에 신령(神靈)은 만물에 두루 있어, 편재(遍在)해 있다고 하며 만물 속에 깃들어있어, 내재(內在)한다고도 한다.

하늘의 이치와 땅의 기운이 서로 교합하여 만물의 생육이 이뤄진다고 보면 그 생육(生育)은 참으로 묘하고 묘하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만물의 생육과 그 생육의 이치와 현상을 다 규명하거나 표현해 내기 어렵기 때문에 '묘하고 묘하다'는 말로 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령한 기운이 작용하고 있다고들 말한다.

이렇게 보면 신령이란 인간은 물론 모든 존재자(存在者)에 들어 있고, 아니 존재자 자체가 신령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인간을 두고 만물의 신령(神靈) 가운데 그 우두머리, 곧 영장(靈長)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람이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에 일원(一元)으로 참여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없으면 이 같은 천·지(天地)의 신령한 조화를 알아차리고 표현하여 나타낼 수 있는 그 무엇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간을 지고(至高)의 존재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만물을 탄생시킨 하늘, 땅과 더불어 사람이 삼위(三位)의 한 자리를 얻었을 뿐이지 더 이상은 아닌 것이다.

사람은 얼을 가진 '물건'이다. 얼은 곧 신령이다. 만물도 얼을 가지긴 마찬가지인데 다만 인간처럼 그 '마음'으로써 명백한 얼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없다.

만물이 모두 얼을 갖추고 있지만 인간과 그 차이가 현저하듯이 인간끼리도 그 얼의 밝기는 매우 다르다. 마치 반딧불과 초승달, 보름달의 빛남이 다르고, 석양과 중천에 떠오른 해처럼 그 빛의 밝기가 다르듯이 얼이 빚어내는 인간의 밝기는 모두가 다르다. 또한 그 타고난 것이 다르기도 하지만, 그보다 어떻게 공부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가진 얼은 밝아지기도 하고 무명(無明)에 덮여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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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곡선생 문집 목판본.

우곡 박신윤은 그 타고난 품부(稟賦)가 걸출했고, 어릴 때부터 힘써 배운 공부로 그의 학문은 젊어서 큰 성취를 이루게 되었다. 선생의 일대기인 '우곡선생 연보(年譜)'를 보면 그의 자질과 공부의 지극함을 엿볼 수 있다.

"12살에 부친상을 당하여 통곡하고 애통함이 심하여 몸을 상하였고, 상(喪)을 주관하는 것이 마치 어른과 같으니 조문하는 사람들이 모두 슬픈 감동을 느끼고 기이하게 여겼다.

또 14살 때 낙빈 이시장(洛濱 李是樟) 선생을 찾아가서 공부를 시작하였고, 그 문하에서 17살에 <논어>를 읽다가 증점의 말끝에 유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20살에 스승에게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모친을 봉양하는 데 전념하였고, 모친이 병이 있으면 변을 맛보아 증세를 진단하였다.

24살에는 창원 반룡산(盤龍山) 구석에 서실을 지었으며, 25살 때 과거 응시와 관직을 얻으려는 마음을 접고 염락(濂洛)의 서적,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을 널리 읽고, 평생 동안 공을 드린 것은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이었다."

연보의 기록에 과장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열 살을 넘긴 나이로부터 채 서른이 되기 전까지 10여 년간 선생의 행보는 마치 100년의 삶에 견줄만하게 성큼성큼 걸어 나갔고 굵직하다.

이를 보면 그의 조숙함이 어느 정도였는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선생이 어린 나이에 상주(喪主)가 되어 그 슬퍼하는 모습이나 조문을 받는 예와 일의 처리를 보고 문상객들이 기이하게 여길 정도라고 하였고, 모친의 병환을 돌보며 환자의 변으로 병세를 관찰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선생의 효심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부모가 자식의 변을 입에 될 수 있는 것은 본능적인 내리 사랑이지만, 자식이 거슬러 부모의 변을 맛본다는 것은 유가의 성현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유교의 효경(孝敬)은 이처럼 지극한 정성을 어린 아이에게까지 미치게 한 것이다.

25살에 정사(精舍)를 지어 본격적인 정주학(程朱學·송나라의 성리학을 완성한 정이형제와 주희로 대표되는 송학의 다른 이름) 공부에 나아갔다. 이중 <심경>은 불교의 <반야심경>으로 잘못 알 수 있는데, 그것과 달리 13세기 남송의 유학자인 진덕수(眞德秀)가 유교경전과 남·북송 도학자들의 저술에서 심성 수양에 관한 말씀을 모은 책이다.

또 <근사록>은 주희가 친구인 여조겸(呂祖謙)과 함께 '북 송의 네 선생', 즉 주돈이(周敦頥), 정호(程顥)·정이(程頥) 형제 그리고 장재(張載)의 문집에서 요점을 발췌하여 주제별로 분류 편찬한 책이다. 위 두 책은 성리학-도학을 공부하는 유학자들에게 필수적인 문헌이었다.

우곡선생은 정주학 공부를 토대로 유교의 경전인 사서(四書) 가운데서도 <중용>과 <대학>에 매진하였고 유학이 가르치는 심법(心法)의 깊은 곳까지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그는 33살 때 경북 영해의 큰 유학자인 항재 이숭일(恒齋 李嵩逸)선생을 배알하고 <근사록>의 세세한 말을 여쭈었으며, 36살 때 같은 고을의 곡천 김상정과 함께 항재선생을 다시 찾아뵙고 항재로부터 '홍의(弘毅)'라는 명(銘)을 받아 도학에 대한 인증(認證)을 받았다고 보여 진다.

마침내 그는 서른여덟 살에 병이 깊어져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절구(絶句) 한 수를 짓는다.

하늘과 땅은 큰 부모요 (건곤대부모乾坤大父母)

부모는 작은 천지라 (부모소천지父母小天地)

실오라기만한 갚음도 하지 못한 채 (사호보부득絲毫報不得)

몸이 없어지니 한이 끝이 없구나 (존몰한무이存歿恨無已)

불가의 선지식이 죽음에 앞서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혹은 우국지사들이 절명시(絶命詩)를 남겼듯이 우곡선생은 다소 비장감이 느껴지는 오언절구를 남겼는데, 절창(絶唱)이다.

그는 이미 천지신명을 받아들여 하늘과 땅이 남이 아니요, 인생 또한 자연의 작은집으로 여겼다. 천지를 더 큰 부모로 섬겼고, 비록 천지가 큰 부모일지라도 낳아준 아비 어미가 없으면 나의 존재는 현존하지 않음을 깨닫고는 하늘을 공경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선비의 지극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좀 더 따져보면 그는 하늘 섬김을 부모를 섬기는 것과 비교하여 더 큰 부모라 하였으니, 그의 도학은 우주와 인생을 이치(理致), 곧 이법(理法)으로 관조한 송나라 성리학의 이법천(理法天)의 세계를 넘어, 하늘을 두려워하고 섬겼던 사천(事天), 즉 공맹(孔孟)의 '근본 유학'에 회귀하였음을 이 시로써 판단해 볼 수 있다.

우곡 연보에서도 그는 정주학에 매진했으나 평생 공을 드린 것이 원시유학시대의 저작인 <중용>과 <대학>이라 한 점도 이 같은 해석을 타당하게 해주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 삶이 너무 짧게 끝난다는 데 대해 한탄을 하고 있지만 죽음을 무서워하거나 아쉬워한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어머니를 남기고 자식이 먼저 가는 통탄과 자신의 학문의 발전과 성취가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운명이 이를 가로 막으니 한스러움이 끝없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절구 4구 중 3, 4구는 마치 시인 두보가 제갈량의 사당을 찾아 지은 <촉상(蜀相)>이란 시의 마지막 구절을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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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곡선생 문집 활자본.

"출사미첩신선사(出師未捷身先死)하니 장사영웅루만금 (長使英雄淚滿襟)이라: 출병하여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길이 후세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이 옷섶을 적시게 하네."

선제(先帝)인 유비가 죽기 직전 제갈공명(諸葛孔明)에게 삼국통일 대업을 유촉하였는데, 공명은 유지를 받들어 후주(後主) 유선에게 출사표(出師表)를 올리고 두 차례 위(魏)나라 정벌에 나섰다가 뜻을 이루기 전에 싸움터에서 병을 얻어 죽는다. 후세의 기술자(記述者)는 이 장면을 '오장원(五丈原·두 번째 중원 원정에 나섰던 공명이 위나라의 사마중달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고 병이 들어 숨을 거둔 곳)에서 별은 떨어지다'라고 이름 지었다.

공명과 우곡의 여한(餘恨)은 어쩌면 한 갈래로 같은 것인지 모른다. 어찌 비장한 한 장면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박신윤 묘표'는 "처사는 본디 병이 많았는데 무인년 가을 병들어 누워 절구 한 수를 짓고는 집안사람을 시켜 집안을 청소하고 조용히 시킨 뒤 아내와 딸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적고 있다.

선생의 임종 장면을 '우곡선생 연보'에는 색다르게 기록하였다. "모부인이 아들의 죽음 앞에 애통해 마지않으니 선생이 눈을 뜨고 소생하기를 세 번을 거듭하고 주위를 보고 '속이기 어려운 것이 하늘이고 사정이 없는 것이 귀신이니 내 장차 어찌 할꼬' 하며 눈물을 흘리고 돌아가셨다."

다석 유영모가 현자로 받든 마하트마 간디는 <날마다의 명상>에서 "죽음의 위험은 늘 있게 마련인데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겁쟁이는 죽기 전에 여러 번 죽는다는 영국 속담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다. 내가 늘 말하지만 죽음은 참으로 고통과 고뇌에서 건져짐을 뜻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고통을 더해주고 상황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고 했다.

간디의 말씀을 보면 성현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우곡선생도 병이 깊어지자 집안을 정돈케 하는 등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줄 알았다. 다만 사세시(辭世詩)를 통해 하늘과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갚지 못하고 일찍 이승을 떠나는 것을 원통해 할 뿐이었다. 특히 어머니보다 먼저 죽는 불효를 감당치 못해 '사정이 없는 것이 귀신이니 이를 어이할 것인가?'라며 사경을 헤매면서도 눈물을 흘린 것이다.

출세를 바라고 부와 명예를 끝없이 소원하는 인간이지만, 생사의 기로에 서면 이 모든 것은 아무런 가치도 가질 수 없는 것이 된다. 인간은 생과 사의 실존적 상황에 직면하면 지금껏 품어왔던 욕망들이 물거품인 줄 알게 된다.

우곡은 이십 대에 부와 명예를 버렸으며 삼십 대에 도학의 경지에 올랐고, 죽음을 앞두고는 '천지대부모'라는 생의 귀의처(歸依處)를 불러보았다.

다석이 쉰 살 되던 1939년 5월 <성서조선>에 기고한 '이승'이란 시를 보자.

이승의 목숨이란 튀겨 논 줄(絃)

쟁쟁히 울리우나 멀잖아 끊어질 것

 

이승의 목숨이란 피어난 꽃

연연히 곱다가도 갑자기 시들 것

 

이승의 목숨이란 방울진 물

분명히 여무지나 덧없이 꺼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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