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몸을 가누기 어려워 보였다. 정신도 온전치 못했다. 적어도 친손자인 나를 알아봐 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손자가 질문 하나 던지면, 그것이 대답으로 돌아오기까지는 30분이 걸렸다. 한 번은 침묵이 길어지는 듯하여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세로로 세워진 책 몇 권이 눈에 들어왔는데, 유독 한 권이 가로로 뉘어있었다. <마산시사>라는 책이었다(마산시가 존재하던 때 펴낸 향토지다). 종이를 접어둔 흔적이 몇 군데 보이고, 먼지가 쌓이지 않은 유일한 책이라는 점으로 미뤄 자주 들춰보는 듯했다. 침묵을 깨고 책을 화두로 꺼냈다.

대화를 하다 보니 할아버지는 마산시라는 이름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그래서 창원·마산·진해가 통합하여 창원시가 되었다는 설명을 드렸다.

그는 짧게 탄식하고 이어서 말했다. "내 고향 마산이, 마산이…." 그러고는 또다시 긴 침묵에 빠졌다.

2016년 여름 강원도에서의 기억인데, 이제 할아버지와 더는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그는 어른의 사정(?)으로 끝내 고향에 오지 못하고 친척도 없는 강원도에서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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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고향의 의미를 함께 생각할 때가 있다. 난 데서 사는 나로서는 그 의미라는 것이 선뜻 와 닿지 않는다.

올해 작곡가 윤이상 유해가 독일 베를린에서 통영으로 돌아왔다. 유해가 묻힌 통영국제음악당에서는 올해도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렸는데 주제가 '귀향'이었다. 죽어서도 돌아오고 싶은 것이 고향이려나. 윤이상의 마음을 지금으로서는 헤아릴 방법이 없겠지마는 어렴풋이 짐작이라도 해본다.

문득 할아버지가 끝내 하지 못한 말이 "그래도 고향 마산에 돌아가고 싶다"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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