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부시, 남북 평화선언 훼방…제네바 합의 깨며 갈등 고조시켜
현 북미 정치적 이해 맞아떨어져…핵 문제 타결 등 협상 성과 주목

◇부시의 등장, 한반도의 운명 가른 537표 = 빌 클린턴이 북한을 방북해 북한-미국 수교를 구상하고 있을 즈음, 2000년 11월 7일 미국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대북 온건파인 앨 고어와 강경파인 조지 부시가 맞붙었으나 막상막하, 마지막 승부처는 플로리다였다. 플로리다 주에서 이기는 사람이 대통령 선거인단 25석을 얻어 당선된다. 최종 개표 결과 조지 부시가 불과 537표, 0.01% 차이로 앨 고어를 누르고 플로리다에서 승리했다.

조지 부시가 제네바 합의를 지키지 않을 것이고, 이라크와 함께 북한을 공격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2001년 3월 7일,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했다. 그때 조지 부시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 면전에서 “This man..”이라고 막말을 했다. 우리말로 좋게 쳐 줘도 ‘이 자식’이라는 뜻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과 비밀리에 2001년 5월 김정일 위원장 서울 방문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때 ‘한반도 평화선언’을 추진하고 있었다.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은 당사자인 미국이 참여해야 하기 때문에 일단 남북만이라도 평화선언을 해 놓고 미국을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으로 이끌자는 계산이었다. 이 계획을 낱낱이 알고 있던 조지 부시는 불과 4개월 전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막말을 뱉은 것이었다. “어디 감히 미국 허락 없이 그딴 것을 추진하느냐”는 경고였다.

2001년 9·11테러로 전쟁의 명분을 얻은 부시는 2002년 2월, 국정연설에서 ‘악의 축’으로 이라크와 이란, 그리고 북한을 지목했다. 사실상 전쟁 대상자를 지목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문제는 북한과 맺은 제네바 합의였다. 2002년 10월 3일 제임스 켈리 동아시아 차관보는 조지 부시의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북한 고위급 인사들에게 “고농축우라늄으로 핵 무기를 개발하는 중인 걸 알고 있다. 시인하라”고 독촉했다. 북한은 거듭 부인했다. 켈리는 북한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미사일 문제, 인권 문제 등을 거론하며 북한의 심기를 자극했다. 북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은 켈리에게 “고농축우라늄보다 더한 것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켈리와 조지 부시는 이것이 바로 북한이 핵무기를 비밀리에 개발하고 있다는 것을 실토했다고 단정했다. 2002년 10월 17일 미국은 공식적으로 “북한이 핵 무기를 개발 계획을 추진 중이다”고 발표했다. 이를 명분으로 삼아 제네바 합의를 무력화시켰다. 2002년 11월 14일,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에 매년 지원하던 중유 50만 톤을 중단했다. 북한 또한 바로 행동으로 나섰다. 영변 핵 시설을 재가동하기 시작했으며, 핵 개발을 감시하던 IAEA사찰단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2003년 1월 10일, 북한은 핵확산방지조약(NPT)를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북한과 미국이 맺은 제네바 합의가 완전히 백지화되는 순간이었다.

미국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다음으로 북한이 다음 공격 목표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백악관 앞에서는 “북한 공격 시도를 중단하라”, “한반도에 평화를”이라는 문구를 내건 반전단체 항의가 이어졌다.

2단계 제4차 6자 회담 7일째인 2005년 9월 19일 낮 댜오위타이에서 열린 전체회의에서 한반도 비핵화 원칙 등 6개 항의 공동성명을 채택한 6개국 대표들이 손을 맞잡고 있다. /연합뉴스

◇중국이 나서다 = 이제 북한과 미국은 서로를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라크 전쟁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파국이라는 걸 국제사회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두 나라 사이에 합의를 하더라도 언제든지 파탄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재자와 합의를 ‘보증’할 누군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6자 회담이다. 북한, 미국, 남한, 중국, 일본, 러시아 등 한반도 이해당사자 모두가 참석한 자리에서 북미 간 합의를 이끌어 내고 나머지 나라들이 합의를 보증·담보하고 지원한다는 개념이다. 중국이 의장국으로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2003년 8월, 제1차 6자 회담이 베이징에서 열렸다. 그러나 미국과 북한의 골은 깊었다. 핵심은 북미 간 협상인데, 전혀 진전이 없었다. 2004년 2월에 2차 회담이 열렸다. 겨우 합의를 이룬 것은 ‘상호 존중의 기초 위에서 대화를 통해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전쟁은 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았다. 3차 회담은 2004년 6월, 4차 회담은 2005년 7월과 8월에 열렸다. 4차 회담에서 많은 진전을 보였고, 9월 19일 합의안이 나왔다. 9·19공동성명이라 불리는 이 합의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개발 계획을 포기한다. 둘째, 미국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들여 놓지 않으며,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 또는 침공할 의사가 없다. 셋째, 북한은 핵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할 권리가 있다. 넷째, 이에 따라 적절한 시기에 북한에 경수로 원자력 발전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모든 쟁점이 타결됐다. 그리고 11월에는 이 합의를 이룰 구체적인 방법도 정리했다. ‘행동 대 행동’ 원칙이라 불리는 방법이다. “네가 요만큼 하면 나도 그에 상응하는 요만큼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합의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다른 문제가 생겨나고 있었다. 방콕델타아시아(BDA)은행이라는 태국에 작은 은행이 있다. 그곳에는 약 3000만 달러가 넘는 김정일의 자금이 있었다. 미국은 이것을 알아내고 9·19공동성명 이틀 전 자금을 동결시켰다. 9·19공동성명 이후에도 이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9·19공동성명엔 이행할 날짜가 전혀 명시돼 있지 않았다.

2006년, 9·19공동성명이 이행을 촉구하며 북한은 다시금 벼랑 끝 전술로 나갔다. 2006년 7월 5일 대포동 2호를 발사했고, 10월 9일에는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렇게 되자 9·19공동성명을 살리기 위해 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노력은 이어졌다. 2007년 6월에 미국은 방콕델타아시아은행에 묶인 김정일 자금을 풀어서 북한에 송금했다. 또한 중유 5만 톤을 지원했다. 이제 북한 차례. 2007년 7월 영변 핵 시설 가동을 중단하고, 핵 시설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미국·중국·러시아 기술자들이 북한을 방문했다. 북한은 현재 보유하고 있는 모든 핵 시설과 핵 물질을 6자 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보고하고, 영변 핵 발전소 냉각탑을 폭파해 비핵화 의지를 보였다. 미국은 2008년 10월 12일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지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그 이후 북한과 미국은 협상장에 앉지 않았고, 6자 회담은 무산됐다. 북한은 2009년 다시금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고, 5월 25일 두 번째 핵 실험을 했다. 미국 오바마 정부는 ‘무시’ 전략으로 일관하면서 북한이 행동에 나서면 경제제재로 반격했다. 2012년 2월 29일 북미 간에 일부 합의가 있었으나 4월 13일 북한이 광명성 3호를 발사하면서 다시 파기됐다.

이후 오바마 정부의 무시 전략에 맞서 북한은 경제봉쇄 속에서도 핵무기 기술과 장거리 미사일 기술을 고도화 하는데 성공했다.

◇보수정부의 판단 오류와 김정은 = 대한민국 정치지도자 가운데 국제적 명망과 권위가 가장 높은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그도 앞서 언급한 대로 단독으로 움직이다 조지 부시 대통령 ‘This man’ 한 마디에 무너졌다. 그만큼 남한의 역할은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분단의 당사자·냉전의 피해자임을 내세워 북핵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발언권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보수정부는 ‘북한 붕괴론’에 매몰돼 있었다. 이명박 정부는 “김정일이 곧 죽을 것이고, 북한이 붕괴된다”는 정보를 철썩같이 믿었다. 그래서 북한에 대한 지원이나 남북화해는 무의미하다고 봤다. 물론 2009년 10월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려 했지만, 정상회담을 일회성 이벤트로 접근했다. 북한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박근혜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최순실이 손 본 ‘드레스덴 선언’에서 ‘통일은 대박’이라고 얘기했지만 그가 믿은 ‘통일’이란 어린 김정은이 오래 가지 못하고 북한 체제가 붕괴할 것이라는 정보에서 나온 사실상 ‘북한 흡수론’이었다. 자연히 북핵 문제에 대한 발언권도 사라졌고, 미국의 행보에 발을 맞출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 둘의 기대와 달리 북한 체제는 붕괴하지 않았다. 김정은 위원장은 장성택을 처형하면서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얼마 전 김정은은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나러 2박 3일 동안 중국을 방문했다. 평양을 비워도 그의 권력을 흔들 세력은 없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 그리고 당을 중심으로 한 ‘정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체제를 변경했다. 사실 사회주의 국가는 공산 혁명 과정에서 당이 세운 ‘임시국가’에 가깝다. 따라서 당의 강령이 헌법 보다 위에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 연임 문제도 공산당에서 결정하고 요식행위를 거쳐 국가 헌법에 적용했다. 중국과 북한은 군대가 없다. 다만 당 규약에 따른 당 소속 군사조직(중국 인민해방군, 북한 조선인민군)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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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문재인, 김정은./연합뉴스

김정일은 국방위원장이라는 직함에서 드러나듯이 미국과의 대립 속에서 군부에 의존해 권력을 운영했다. 김정은은 스스로 당 위원장에 올라 당을 중심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했다. 이게 ‘상식적인’ 사회주의 국가 시스템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김정은 체제는 김정일 체제 보다 더 안정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작년과 올해 보인 과감한 행보에는 이런 자신감이 바탕에 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구체적인 성과를 겉으로 드러내기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는 11월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어떻게든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미국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은 꾸준히 인내하면서 계속해서 북한과 미국을 협상장으로 이끌 것이다. 북한 핵 문제가 올해 해결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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