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사회주의 국가 몰락에 위기감에 결국 '핵'선택
1차 북핵위기 제네바합의로 반전, 클린턴 시기엔 북미 관계 정상화

'4·27 남북 정상회담'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는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이다. 이를 위해선 북한 핵 문제를 주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 앞서 북한이 왜 핵을 선택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의 총성이 '일단' 멈췄다. 한국전쟁으로 냉전은 고착화 됐고, 세계는 양분됐다. 초토화된 한반도를 보며 미국과 소련은 '다음에 정면으로 붙으면 핵전쟁이고, 인류 멸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냉전은 그렇게 위험한 것이었고, 미국과 소련은 핵 군비 경쟁을 하면서도 냉전 체제를 없애기 위한 출구를 모색해왔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 소련의 개방과 동구권이 열리면서 냉전은 자연스럽게 해소됐다. 하지만 단 한 곳에서만 예외였다. 한반도였다.

북한은 지난 21일 핵 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중단 및 핵실험장 폐쇄를 발표했다. 사진은 2008년 6월 27일 북한 영변의 핵 시설 냉각탑이 폭파되는 모습. 지난 1989년 영변 핵 시설이 프랑스 위성에 잡히면서 북한 핵 개발 논란은 시작됐다. /연합뉴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위기감을 느꼈다.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 간 일종의 물물교환식 원조 체제가 무너졌다. 과거의 동지는 거래의 대가로 현물이 아닌 달러를 요구했다. 게다가 소련이 남한과 수교를 하자 북한은 체제 경쟁에서 밀려 동독처럼 붕괴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북한은 미국에 손을 내밀었지만 미국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결국, 북한은 핵을 선택했다.

그렇게 시작된 북핵 문제는 1993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25년 동안 극단적인 부침을 거듭했다. 위기가 닥치면 역설적으로 대화와 타협의 장이 열렸다. 기껏 선언, 성명, 합의를 이끌어내면 종잇조각으로 전락하기 일쑤였고, 다시 위기가 시작됐다. 

북핵 문제로 인한 긴장과 갈등은 그 피해가 고스란히 우리에게도 이어졌다. 현대아산, 개성공단 등 남북경협에 투자했던 기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서해해전과 연평도 포격 등으로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됐다. 보수 정치세력은 안보 정국으로 위기를 벗어나려 했고, 진보세력은 종북 프레임에 갇혀 수차례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또한, 반공·종북 프레임은 인권 증진, 실질적 평등, 경제민주화, 사회개혁에 큰 걸림돌이 됐다. 숱한 개혁적 의제가 종북 프레임에 좌절됐다.

1994년 4월 21일 방한 중인 윌리엄 페리 미 국방장관이 신라호텔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현재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은 없으며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원치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불바다가 될 뻔한 1994년 북핵 위기 = 북한이 핵개발을 하고 있다는 증후가 처음으로 포착된 것은 1989년이었다. 프랑스 위성에 영변 핵 시설이 잡히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영변 핵 시설을 사찰한다. 하지만 사찰에 잡히지 않는 또 다른 시설이 있었다. IAEA는 그곳을 특별사찰해야 한다고 했으나 북한은 거부했다. 북한은 1993년 3월 12일 '핵확산방지조약(NPT)'을 탈퇴했다. 이는 '나는 핵무기를 만들겠소'라고 선언한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면 다른 나라라고 핵을 만들지 못하라는 법이 없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의 패권체제가 무너진다는 뜻이다.

미국은 협상에 나섰다. 덩달아 남북 간에도 고위급 협상이 열렸다. 그러나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1994년 3월 19일 남북고위급 회담 북한 수석대표는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았으니 전쟁이 나면 서울이 불바다가 된다"고 위협했다. '서울 불바다 발언'은 대화 국면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어 북한은 같은 해 5월 29일 휴전협정을 관리하는 군사정전위원회를 폐쇄한다고 통보했다.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이 시작됐다. 5월 13일에는 영변 핵 시설에서 폐연료봉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는 플루토늄을 추출해 핵무기를 만들겠다는 의미다.

같은 해 6월 13일 북한은 IAEA마저 탈퇴했다. 한반도 전쟁 위기가 높아졌고, 서울 강북 집값이 폭락했다. 그러자 빌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 폭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6월 16일 폭격 준비와 함께 남한 내 미군 병력을 2만 3000명 증원하고 항공기와 항공모함도 추가로 배치하기로 했다. 전쟁이 코앞에 닥친 그때, 회의가 끝나기 직전에 지미 카터 전 대통령으로부터 클린턴에게 전화가 왔다. 카터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중지하고 IAEA사찰을 수용하겠다고 전했다. 또한, 남북 정상회담도 합의됐다. 예정대로라면 1994년 7월 25일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묘향산에서 만날 계획이었다. 그러나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정상회담은 물거품이 됐다.

김일성 사망에도 북한과 미국 간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10월 21일 유명한 북미 제네바 합의가 이뤄졌다. 북한은 핵 발전소 가동을 중단하고, 핵 물질을 무기 개발에 사용하지 않으며 이와 관련된 사찰을 받기로 했다. 대신 미국과 남한은 북한에 핵무기로 활용하기 어려운 경수로 원자력 발전소를 2003년까지 지어준다고 약속했다. 이에 북한이 "발전소가 없으면 우리는 어떻게 전력을 생산하느냐"고 하자 미국이 매년 50만t씩 중유를 공급해 주기로 했다.

이렇게 1차 북핵 위기는 제네바 합의로 극적인 반전을 맞으면서 마무리됐다.

◇북한-미국 수교 직전까지 갔지만 = 이후 북한과 미국은 큰 갈등을 빚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지만 1995년부터 북한은 자연재해로 인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다.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식량위기로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약 40만 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UN은 파악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지원이 이어졌고, 남한도 이때부터 식량과 물자를 북한에 보내기 시작했다.

1998년 8월 10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북한 영변 동북쪽 40㎞ 떨어진 금창리라는 곳에 거대한 지하시설 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것이 비밀 핵 시설이 아니냐는 의혹이 증폭됐다. 미국은 그곳을 살펴보겠다고 했고, 북한은 핵과는 무관한 군사시설이므로 공개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31일 북한이 장거리 탄도 미사일인 대포동 1호를 시험 발사했다. 대포동 1호는 불완전하지만 1500㎞를 넘게 날아 일본 열도를 지나 태평양에 떨어졌다. 미국은 분노했다. 당장 제네바 합의 폐기와 북한에 대해 제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졌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98년 11월 윌리엄 페리 전 국방부 장관을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했다. "당신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판단해서 북한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알려주시오"라고 전권을 맡겼다. 페리는 북한과 남한, 그리고 주변국을 부지런히 오가면서 모든 정보를 취합하기 시작했다.

페리는 정보를 취합한 후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첫째, 북한에 대해 봉쇄정책을 펴도 북한체제가 붕괴되지는 않는다. 둘째, 북한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셋째,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고, 북한과 미국 관계를 정상화하고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고 했다.

1999년 미국과 북한은 여러 곳을 오가면서 협상을 이어나갔다. 북한은 미사일이 주요한 수출품이기 때문에 시험 발사를 안 하는 대신 경제적 보상을 하라고 주장했다. 한편, 북한은 금창리 지하 시설을 미국에 공개했다. 금창리 지하 시설은 핵과 무관한 복합터널로 밝혀졌다.

일부 오해를 푼 미국과 북한은 2000년 제1차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더욱 가까워졌다. 북한 군부 서열 2위인 조명록 차수가 미국 워싱턴을 방문하고, 미국 올브라이트 장관이 북한 평양을 방문해 빌 클린턴 대통령 친서를 전달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을 방문해 북미 수교와 한국전쟁 종전을 원했다. 그러나 2000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부시가 당선되면서 모든 것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대표단 환송 오찬에서 밝은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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