놋금, 어릴 적 내가 살았던 동네 이름이다. 행정명은 '유구마을'이지만 우리 동네 어른들도, 남의 동네 어른들도 우리 동네를 '놋금'이라고 불렀다. "어느 마을에서 사니?"라는 물음에 "유구에 삽니다"라고 대답해도 늘 "아하, 놋금에 사는구나"라는 식이었다. '놋금'은 옛날에 놋그릇을 많이 생산하던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 이름을 들으며 나는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들도 놋그릇을 만들지 않았을까… 내 뿌리의 흔적을 상상한 적이 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오랫동안 '놋금'이라고 불리던 마을이 '유구'마을로 바뀐 건 조선시대 말, 일제 강점기였다고 한다. 순우리말, 한글로 된 마을 명칭을 한자식으로 표기하면서부터다. 놋그릇, 유기그릇을 만드는 마을을 한자식으로 표기하면 '유구'인 것이다. 우리말 '놋금'이 '유구'로 바뀐 순간, 옛날 옛날에 우리 마을을 상상할 스토리의 힘도 사라졌다.

'놋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무지개' 마을이 있다. 어릴 적 내 친구가 살던 동네 이름이다. 행정 명칭은 '홍현 2리'였지만 무지개를 '홍현 2리'라고 부르는 남해 토박이는 거의 없었다. 나도, 내 친구들도, 내 친구들의 친구들도 무지개 마을이라고 불렀다. 무지개는 택시 기사조차 차바퀴가 빠질까 봐 가기 꺼린다는 소문이 돌 만큼 산 중턱에 오목하게 자리 잡은 마을이다. 땅 밑의 마을과 공기부터 달랐던 무지개 마을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었다. 무지개가 뜰 만큼 높은 곳에 있어서 무지개였고, 물지게를 지고 힘들게 고개를 올라갔던 마을이라고 해서 무지개였다. 이렇든 저렇든 무지개라는 마을 이름은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의 지형을 잘 알려주고 있다. 콘텐츠가 곧 브랜드가 되는 지금, 딱딱한 한자 '홍현'보다 알아듣기 쉽고 예쁜 우리말 '무지개'의 힘이 훨씬 크지 않을까 싶다.

사천에도 기억나는 마을이 있다. 대학교 때 농활을 갔던 '백천마을'이다. 방문객이었던 나는 '백천' 마을이라고 불렀지만 동네 어르신들은 자신들의 동네를 '흰돌'마을이라고 불렀다. 멀리서 보면 물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냇가에 흰돌이 많았던 동네라고 해서 '흰돌'마을이라고 소개했다. 냇가에 흰돌이 많은 마을, '백천' 또한 한자식으로 마을 명칭을 변경시킨 것이다. 어디 이뿐만이랴. 대나무가 많은 동네 '대나무골'을 '죽전'으로, 숲이 많은 동네 '숲실'을 '임곡'으로, '배나무골'을 '이목'으로, 밤밭골을 '율곡'으로, 경남에는 우리말 이름을 딱딱한 한자로 변경한 마을들이 부지기수다.

이름만 들어도 마을 역사를 알 수 있는 우리말 지명을 왜 바꾼 걸까? 우리말 지명을 한자식으로 표기한 이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일제의 '창지개명'이다. 1910년 조선 국권을 강제 침탈한 일본제국은 국토의 고유 명칭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이른바 '창지개명'을 추진한다. '창지개명'이 추진되면서 무려 조선의 97개 군, 1834개 면, 3만 4233개 이·동의 우리말 이름이 사라지거나 바뀌었다고 한다. 식민지 통치를 위해서 행정구역의 재편이 필요했고, 계획적으로 지명을 바꾸었던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선조가 불렀던 우리말 지명들이 하루아침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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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 않게 불렀던 우리 동네 이름이 일제 잔재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몰랐으면 모를까, 알아버린 이상, 지금이라도 마을과 지역 특색이 담긴 우리말 지명을 되찾을 방법을 고민했다. 고민 끝에 경남도와 언론사가 함께 경남의 우리말 지명 찾기 캠페인을 벌인다면 괜찮지 않을까. 일제 잔재 청산은 물론, 우리 마을 역사를 찾기 위해서라도 필요하지 않을까? 수줍게 제안하는 바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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