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의 태풍 (1) 1987년 태풍 '셀마'
30여년 전 괌 부근서 발생 초속 65㎧·영향권 1850㎞…루사·매미보다 3~4배 커
기상청 "대마도로 빠질 것"…태풍은 전남 고흥반도 상륙
피항하지 못한 선박 피해, 죽거나 실종된 인원 345명
오보 숨기려다 언론사 취재로 '발각'…고위 간부들 줄줄이 옷벗어

이제 곧 여름이 다가온다. 달리 말하면 '태풍 시즌'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자연현상 가운데 유일하게 이름이 있는 것이 태풍이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일생이 있다는 것이고, 스토리가 있다는 것이다. 태풍이 어떤 스토리를 남기고 가느냐에 따라서 마을 형태가 변하기도 하고, 누군가 죽기도 하고, 누군가 빚더미에 오르기도 한다. 때에 따라선 가뭄과 폭염을 물리쳐주는 효자가 되기도 한다. 기자의 어린 시절 기억을 토대로 태풍이 남기고 간 이야기를 되짚어 보도록 하자.

기자의 고향은 경북 경주시 양남면이다. 월성원자력발전소로 유명하고, 주상절리로도 유명하다. 기자가 살던 집은 해안가에서 약 2㎞ 내륙으로 들어간 곳이다. 불과 해안에서 2㎞ 떨어졌지만 마을에 어업과 관련된 사람은 전혀 없는 완전한 농촌마을이다.

어렸을 때는 태풍이 뭔지 몰랐다. 내 기억 속 첫 태풍은 1987년 7월 15~16일 우리나라에 상륙한 태풍 셀마다.

태풍 셀마가 휩쓸고간 송도 해수욕장. /PNU로컬리티아카이브

셀마가 온 날, 종일 집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까지도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7살에겐 참으로 답답한 시간이었다. 바람이 좀 약해졌다 싶으면 마루에서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돌이켜보면 장마까지 겹쳐서 더 많은 비가 온 것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바람이 많이 불었기 때문에 당시 아날로그 TV수신기로 텔레비전을 보는 건 어려웠다. 옥상 안테나를 고정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라디오(가끔 일본 방송도 잡히던)를 종일 틀어놓고 있었다.

라디오를 하염없이 듣던 중 아나운서가 "현재 사망·실종 합계 100명을 넘었습니다"라고 했다. 100이라는 숫자가 왜 그렇게 꽂혔던지.

그렇게 태풍 셀마는 '100명'이라는 숫자와 함께 기억에 남았다.

태풍 셀마 피해 기록 영상. /KTV 대한뉴스

1999년,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인터넷을 처음 접했다. 자연히 기상청 홈페이지와 태풍 데이터도 처음 접했다. 기자는 태풍 셀마로 백 수십 명 정도 사상자가 발생했을 거로 생각했지만, 무려 345명이나 죽거나 실종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당시 내 기억과 너무 달라 당황스러웠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일단 태풍 셀마에 대해 알아보자. 태풍 셀마는 1987년 7월 11일 괌 부근에서 발생했다. 이어 필리핀 동쪽 해상에 진출했을 때는 중심기압 911, 중심 최대 풍속(1분 기준) 초속 65㎧에 달하는 초강력 태풍으로 자라나 있었다. 특히 셀마의 영향으로 초속 15m 이상 강풍이 부는 범위(태풍 영향권)가 무려 1850㎞에 달한다. 한반도 4개 정도는 거뜬히 들어갈 면적에 초속 15m 이상 강풍이 계속해서 분다는 말이다.

이는 우리 기억 속에 있는 태풍 루사나 매미, 차바보다 3~4배에 이른다. 사실 영향권이 1000㎞가 넘는 태풍이 몇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점을 생각해 보면 셀마가 얼마나 대단한 태풍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태풍 셀마로 인해 전봇대가 무너졌다. /KTV 대한뉴스

하지만 그건 필리핀 동쪽 해상에 있을 때 위력이고, 아시다시피 태풍은 북쪽으로 오면서 차츰 약해진다. 그리고 이때는 7월 중순이다. 남해안 바닷물이 따뜻해지기 전이다. 태풍은 차가운 바다에 가면 급속도로 힘을 잃는다. 셀마는 전라남도 고흥반도 부근에 상륙하는데, 당시 중심기압이 970, 중심 최대 풍속은 40㎧정도, 강우량은 산청군 296㎜를 최고로 강릉시 270㎜, 남해군 265㎜ 등을 기록했다. 이 정도면 상당한 위력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압도적인 위력은 아니다.

태풍 매미나 사라 같은 '역대급 태풍'은 한반도 상륙 당시 중심기압이 950(기압이 낮을수록 태풍은 강하다) 내외였고, 최대 풍속도 초속 50~60m를 넘나들었다. 강우량도 300㎜는 기본(?)이고 심하면 태풍 루사처럼 870㎜를 퍼붓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태풍 셀마의 위력 자체는 극단적으로 강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럼 왜 이렇게 큰 피해를 보았을까?

당시 중앙기상대(현 기상청)는 태풍 셀마가 북상할 때 한반도에 상륙하지 않고 대한해협-대마도 인근으로 빠져나갈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일본 기상대나 미 해군 기상대는 한반도 남부지방에 상륙할 것이라 예상했다.

사실 셀마가 한반도에 접근할 당시 위력은 중형~중대형급 태풍이었다. 이런 태풍이 직접 상륙하는 것도 아니고 대마도 방향으로 빠져나가리라 생각해 보자. 영남 지역은 몰라도 호남 지역 사람들에게는 '큰 피해 없을 것이다'라고 오해를 살 수도 있다. 그 때문인지 호남 지역 어민, 산업현장에서 상당한 피해가 이어졌다. 특히 일부 어부들은 태풍이 온다는 말에도 대피하지 않고 어선에 있다 변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태풍 셀마가 지나가고 난 후, 중앙기상대는 태풍 셀마의 진로를 부산 앞바다를 스쳐 지나간 것으로 발표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앙기상대 예보가 완전히 틀린 셈은 아니게 된다. 부산 앞바다도 억지로 따지자면 '대한해협'에 속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7월 17일 자 1면 기사에서 일본 기상청 진로를 참조해 애초에 중앙기상대 진로가 틀린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기상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7월 22일 통일민주당은 자체 조사를 통해 책임회피를 위한 진로조작 행위가 있었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1987년 7~9월 사이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 대통령 선거 등 온갖 이슈로 인해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동아일보> 기자는 끈질겼다. 1988년 1월, 중앙기상대가 매달 발행하는 <기상월보>를 기자가 입수했다. 기상월보에는 태풍 셀마의 진로가 슬그머니 고흥반도를 통과해 한반도 남부 내륙을 관통한 것으로 수정돼 있었다. 이 사실이 드러나자 야당의 공세가 이어졌고, 중앙기상대 고위 간부들이 줄줄이 옷을 벗는 기상청 최악의 '흑역사'가 되고 말았다.

태풍이 지나간 고흥반도와 중앙기상대가 예상한 대마도의 거리는 약 200㎞가 된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당시 중앙기상대가 제대로 예보를 했다면 많은 어민의 목숨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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