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다 어린이집 가니까 편하겠네” 웃으면서 던진 그 말에 울컥, 화가 난다. 여유가 생긴 건 사실이지만 세 아이를 등원시키고 나면 해야 할 ‘집의 일’이 만만찮다. 다섯 식구가 벗어놓은 옷가지와 수건을 세탁기 님이 씻어주시는 동안 바닥을 닦는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하루 한두 번 닦는 거론 성이 차지 않는다. 쓰레기를 비워 종량제 봉투에 묶어 내고,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한다. 두꺼운 옷들은 개어 안 쓰는 옷장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아이들 있을 때 하기 힘든 욕실 청소를 한다. 허리 좀 펴자 싶으면 점심시간이다. 부엌에 선 김에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면 먹을 간식과 저녁밥을 미리 준비해둔다.

커피를 타서 책상에 앉으니 미뤄둔 어린이집 숙제가 생각난다. 사진 인화 사이트에 들어가 가족사진을 맡기고, 세 아이의 행동발달을 적으라는 종이를 들여다본다. 예방접종 현황까지 빼곡하게 적고 나면 ‘글 쓰고 싶다’라는 창작 욕구는 저만치 사라지고 그저 누워만 있고 싶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누가 알까. 창틀에 곰팡이가 스는지, 욕실에 물때가 끼는지. 양파에 싹이 나는지. 집안일은 늘 세심한 관찰과 관리가 필요하다. 겨우내 난방으로 창가에 슨 곰팡이를 지운다고 반나절을 쓴 날. 나는 마스크를 쓰고 창문을 벅벅 닦으며 한탄했다. 내가 좋은 글을 못 쓰는 건 이놈의 가사노동 때문이야!

2년 동안 세 아이를 함께 돌본 어머니는 “아이들 돌보신다고 너무 고생 많으십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한결같이 대답하셨다. “아닙니다. 애들이 건강하게 자라주니 그저 고맙죠.” 가사와 돌봄 노동의 대가로 어머니는 월급을 받으셨다. 하지만, 그녀의 가장 큰 보상은 자식들의 건강과 안위였다.

어머니가 가시고 나서, 집안일은 온전히 우리 부부의 몫이 되었다. 나는 남편과 도원결의 하듯 굳게 맹세했다. ‘살림은 대충하고 살자.’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그저 보통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뿐인데도 벅차다. 바닥에 떨어진 깨진 플라스틱을 쓱 입으로 가져가고, 마시라고 준 물을 바닥에 쏟아 미끄러지는 어린아이들을 키우면서 ‘대충’은 말처럼 쉽지 않다.

얼마 전 부끄럽지만, 아이들을 보내놓고 펑펑 울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되는 살림과 육아가 너무 억울하게 느껴졌다. 저녁에 돌아온 남편에게 “딱 하루만 당신이 이 모든 걸 해봤으면 좋겠다.” 했더니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 “힘들면 일 그만둬” 그는 나를 위해서 한 말이라고 했지만 섬뜩했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젠장, 내가 가사를 못 하면 일을 잃겠구나. 가사는 오로지 나의 몫이라 생각하는구나.

딸의 한탄을 듣고 어머니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잠시 지나가는 과정이다, 엄마는 강하니까 오늘도 힘내자. 아자!> 날마다 선량한 얼굴로 파이팅을 외치며 출근하는 남편의 얼굴이 위로 겹쳤다. 모두 같은 말을 하는 것 같다. ‘어차피 네가 할 일이니 즐겁게 하렴,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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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따뜻한 밥을 짓고, 빨래하고, 가족이 쉴 공간을 청소한다. 가사노동은 시간이 지난다고 줄어들지 않는다. 그렇게 나의 노동은 계산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 채 계속 쌓여간다.

아이들이 떠난 집, 빨래를 걷지 않고 가방을 메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입센의 <인형의 집>이 떠오른다. 집에서 나온 노라는 어디로 갔을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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