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것 때문에 삶을 막 살 수는 없는 일
지금 행복한 건 하고 싶은 일 있기 때문

지난달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신 고난주간에 막냇동생이 보낸 문자 가운데 '나를 위해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죽어가게 하소서'라는 말이 너무나 좋아서 계속 되뇌던 중 어느 순간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사는 것하고 죽는 것이 다른 것인가? 사는 것은 좋고 죽는 것은 나쁜 것인가? 사람들은 왜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슬퍼하는가? 그런데 태어나고 싶다고 해서 태어나고, 죽기 싫다고 안 죽는 사람이 있는가? 모두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왔다가 가지 않는가? 사는 것도 내가 죽지 않으니까 사는 것이고, 죽음도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가까이에서 매 순간 생사를 넘나들고 있지 않은가? 사는 것이 기적이라면 죽는 것도 기적이고, 사는 것이 감사라면 죽는 것도 감사가 아닌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내 소관이 아니다. 살아 있으니까 사는 것이고, 죽게 되면 죽는 것이다. 나는 왜 살아야 하고, 왜 죽어야 하는가? 살다 보면 알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각자가 노력에 노력을 해야 알 수 있는 것인가? 옹기그릇이 옹기장이의 깊은 뜻을 어떻게 알리오마는 그러나 한 가지 자명한 것, 누가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더라도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나 혼자, 내 멋대로, 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되는가? 라고 했을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있기 전부터 이미 있었고, 내가 거부할 수 없는 것은 나한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너, 특히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사람들에게 잘해서 평화 하라는 것인데 이것을 진선미, 신의 뜻, 내가 가야 할 길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 온 사람은 있어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은 없기 때문에 죽음을 논한다는 것이 무리이고, 죽음을 제대로 모르면서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일지 몰라도 그러나 죽는 것 때문에 자신의 삶을 막 살 수는 없지 않는가?

죽음으로 인해 삶 자체가 망가진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다고 그 죽음을 삶에 대한 심판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는가? 그리고 죽음이 아무리 다양하다하더라도 수용할 수 있는 죽음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죽음 자체를 거부할 수도 없지 않는가?

죽음은 여전히 비밀스러운 것이지만 그래서 모르는 부분은 덮어 두더라도 죽음이 사는 것만큼이나 자명한 것은 사는 것과 뗄 수 없는 하나이고, 삶을 비추는 사울과 같은 것이고, 삶을 삶 되게 하는 또 다른 동력이기 때문에 죽음이 없는 삶이란 용의 그림을 그린 뒤에 눈동자에 점을 찍지 않은 것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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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그래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내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고, 오늘도 내가 너를 위해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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