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핀 일본 교토 배경
경계심 없이 산책하며
여러 사람과 놀이 즐겨

봄날 한밤중이어야 한다. 시원한 맥주를 울대뼈가 드러나도록 마시고 싶다. 그러다 야간에만 문을 여는 헌책시장에 들러 잊고 있었던 동화책을 읽고 싶다. 하지만 끝은 로맨스여야 한다. 사랑. 나의 '로맨스 엔진'을 가동시킬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

일본 애니메이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감독 유아사 마사아키)의 주인공 검은 머리 아가씨는 벚꽃이 만발한 봄날 밤거리를 걷는다.

단순한 산책이 아니다. 교토 본토초와 기야마치 일대의 밤길에서 만난 기이한 일에 휘말리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술 마시기다. 결혼식 피로연부터 시작하는 영화는 여러 술을 이야기한다. 검은 머리 아가씨는 맥주부터 칵테일, '가짜 전기 부랑'을 마신다. 환갑잔치 중인 의사들을 만나 함께 마시고 궤변춤을 추는 대학 모임 궤변론부원들과 춤을 추며 한 잔 두 잔 들이켠다. 마지막은 애주가 이백 노인이다. '가짜 전기 부랑'을 놓고 술 시합을 벌이는데, 검은 머리 아가씨의 완승이다. 결과는 예상됐다. 가짜 전기 부랑을 한 잔 마신 이백은 공허, 고독, 욕망, 야비함을 느낀다. 반면 검은 머리 아가씨는 한 잔 들이켤 때마다 꽃이 피어난다. 만발한 꽃송이를 보자니 그녀의 승리였다.

검은 머리 아가씨는 헌책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라타타탐-꼬마 기관차의 신기한 이야기>를 찾으러 가는 길. 어렸을 때 읽고 또 읽었던 책이다. 헌책시장에는 신이 있다. 물건을 빼돌려 가격을 올려 파는 악랄한 수집가를 응징하기 위한 신이다.

영화는 또 새로운 무대를 보여준다. 축제가 한창인 대학. 장소를 옮겨다니며 열리는 연극 <괴팍왕> 여주인공이 된 그녀는 열심히 연기한다. 대사를 외우고 노래를 부르며 빤스총반장이 찾아 헤매던 누군가를 기다린다.

검은 머리 아가씨는 참 해맑다. 모든 것이 인연의 실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며 어떤 상황이든 온 힘을 다한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선배'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우연을 가장해 그녀의 눈에 최대한 띄려고 노력하지만 매번 실패다.

주인공은 벚꽃이 만발한 봄날 밤거리를 걷는다. 교토 본토초와 기야마치 일대에서 기이한 인연들을 만나 함께 술을 마신다. /스틸컷

그녀를 찾아 술집을 기웃대다 팬티가 벗겨지고 <라타타탐-꼬마 기관차의 신기한 이야기>를 먼저 찾으려고 악랄한 수집가가 연 매운 요리 먹기 대회에 참가했다 혼이 빠진다. 그녀를 따라 걷기 시작한 밤길에서 말도 안 되는 수난을 겪는다.

영화 후반부 도시가 아주 조용하다. 새벽이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말이다. 알고 보니 감기로 온 도시의 사람들이 앓아누웠다. 홀로 멀쩡한 아가씨는 감기의 신을 퇴치하려고 하나둘 병문안을 시작한다. 그녀가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만났던 사람들이다. 이백 노인도 찾아간다. 어르신은 전설의 감기약을 건네며 말한다. "나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있어. 새벽은 가깝다. 밤은 짧다. 걸어 아가씨야"라고.

그녀는 드디어 선배를 찾아 나선다. 아주 험난하다. 온 도시가 출렁이고 휘청댄다. 하지만 결국 끝은 사랑이다. 둘의 인연은 닿아있었다. 선배는 검은 머리 아가씨의 달걀술과 감기약 덕에 기운을 되찾는다. 그리고 용기를 낸다. 다음날 둘은 데이트를 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하다. 비현실적인 캐릭터는 애니메이션이어서 가능했다. 이는 원작 덕도 있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동명 소설은 가상과 현실을 자유롭게 오가는 천연덕스러운 판타지라는 호평을 받았다.

독특한 그림체와 과한 표현, 기발하고 모호한 경계. 벚꽃 만발한 교토를 여행하는 기분이 들게 하는 영화. 일본 애니메이션의 또 다른 판타지가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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