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분개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불의에 항거하는 1차 의거를 일으켰다. 4월 11일에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에 떠오르자 대규모 2차 의거를 일으켜 4·19민주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댕겼고, 결국 4월 26일 이승만을 하야시켰다.

해마다 4월 11일에는 처참한 모습으로 산화한 김주열 열사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하지만, 3·15의거에 죽음으로 맞선 민주 의인들은 모두 14명에 이른다. 서울에서 보았을 때에는 변방에 불과했던 마산에서 봉기가 발생하자 정권과 경찰은 무자비한 탄압과 폭력을 휘둘렀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항쟁과정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 14명 외에도 270여 명이 총상을 입거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미 1차 의거 때 9명이 경찰의 총격으로 숨졌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오른 날 한 명, 이승만이 물러나는 당일 시위 중에 두 명이 더 희생되었다. 총상으로 근근이 치료를 받았던 두 명은 이듬해와 두 해 뒤 바로 세상을 떠났으며 나머지 부상자들은 후유증과 병마에 시달려 왔다.

안타까운 일은 특히 당시 사망자들에 대한 기록이나 증언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두 세대 가까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유족들이나 지인들은 이미 떠나갔거나 기억이 흐릿해졌고, 또 목격자들을 찾기도 어려워졌다. 어렴풋한 사실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정의로운 열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역사 속에서 파묻히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뒤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김주열 열사뿐만 아니라 나머지 희생자들에 대해서도 추모 사업을 확대하여 역사로 남길 필요가 있다.

3·15의거는 4·19민주혁명의 발화점이요, 이 땅에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전환기적 사건이다. 당시의 역사적 진실은 반드시 기록되고 끊임없이 현재화되어 후대를 위한 민주주의 유산으로서 남길 수 있어야 한다. 그 중에도 국가폭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킨 열사들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가장 소중한 유산이란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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