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그 골목에 갔다] (6) 창원 성산구 상남동
마디미로·분수광장 일대, 청소년 대상 점포 대다수
숨통 틔우는 '해방 공간', 장터에서 상업지구로 변모
이제 또 다른 변화 실감해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10년 사이 상남동 거리가 변했다.

경남 최대의 유흥가라는 이곳….

뭐가 변한 거지?

얼마 전 금요일 저녁 7시 분수광장에서 그 변화를 실감했다.

"아 추워!"

밤이 되면 여전히 쌀쌀한 날씨에 오들오들 떨면서 핫팬츠 차림의 소녀들이 보컬댄스 버스킹을 준비했다.

지난달 30일 금요일 밤 창원시 상남동 분수광장에서 펼쳐진 댄스 버스킹 장면.

춤추는 애들, 노래 부르는 애들, 모여서 기도하는 애들, 웃고 떠드는 애들….

약간 과장해 청소년들이 '500명쯤' 모였다. 500명의 열기가 추위를 녹였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구겨져 있던 자유를 발산했다. 해방공간을 만들었다.

그 변화라는 게 뭔가?

10년 전 상남동은 낮엔 청소년층, 밤엔 장년층이 많았다. 요즘은 밤낮 청소년층이다. 그렇게 상남동은 '청년들의 거리'가 돼 간다.

주변 점포도 그렇다. 분수광장 맞은편 마디미로 1층 점포부터 보자.

유플러스스퀘어, 이니스프리, 할매낙지, 리바이스, VOGA, 분수대앞, 빽다방, 참치나라, 오렌스, aimerfeel japan, K, 섹시쿠키, 미니드레스, 폰고….

죄다 청소년 대상의 의류·휴대폰·음료·음식 점포다.

맞은편 부동산중개소 사장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내가 우찌 압니꺼? 밤엔 퇴근하고 없는데…."

이런….

가까스로 그 뒤에 덧붙인 말.

"빠질 거 다 빠졌지예 뭐. 경기가 전만 못 하니까. 그 대신 청소년층 메이커가 많이 들어왔지."

상남동 상권 변화를 마디미로 한 공간으로 어떻게 단정할까. 심야에 다시 보기로 하고 한잔했다.

밤 11시.

다시 마디미로를 걸었다. 삐끼(호객꾼)들을 대여섯 만났지만 예전보다 줄었다. 불금 절정의 시각이다.

"아가씨 있는데 한잔하고 가이소~."

대답 대신 이것저것 묻자 귀찮아진 듯 "뭐라 카노? 술이나 한잔하소!"

그 사이 어깨 툭툭 부딪히는 행인들 역시 청년들이다. 다시 분수광장에 섰다.

여전히 붐볐다. 젊었다. 떠들썩했다. 거리낌이 없다.

마음껏 자유를 발산하고, 끼를 드러내고, 낭만을 즐겼다.

10년 전에도 나는 상남동의 변화를 기록했다. 그로부터 10년 전의 상남동에 비해 무엇이 변했는지, 이렇게 썼다.(2006년 6월 10일 자)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남장은 창원 최대의 5일장이었다. 그 위치는 서쪽으로 현 대우아파트와 상업지구를 가르는 도로에서부터 남으로는 대동아파트 쪽 토월천, 북으로 각각 우리은행과 국민은행 앞 도로와 그 지점에서 시장의 동쪽 경계가 그어졌다."

상남동 지석묘 주변에 조성돼 있는 시가 흐르는 공원.

"남쪽에서부터 옛 상남사거리 방향으로 소전과 개전 가축전, 어물전 피복전 등의 순으로 빽빽이 들어섰던 장터와 슬레이트집, 그곳 길목길목을 연결하던 좁은 골목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불과 10년 만에 천지가 바뀌어버린 요즘 상남상업지구의 모습에 '내가 꿈을 꾸나' 싶을 정도다."

분수광장 아래 고인돌은 지난 20년의 변화 과정을 목도했을까?

"인근 덕천리 지석묘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남방식 지석묘다. 석관이 깊고 견고하며, 대형 상석을 이용한 것으로 보아 청동기 당시 이 지역 최고 수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에 청동기가 전래된 시기를 넓게 잡아 지금부터 2000∼3000년 전으로 본다.

2000년 이상을 상남동에서 버틴 고인돌에게 20년은 '눈 깜짝할 사이'일까?

고인돌 주변 '시가 흐르는 공원'에 고 정규화 시인이 이렇게 썼다.

"인생은 연습이 없고/세월은 두번 다시 오지 않는다/젊음은 청춘의/꽃이라고 한다 …(중략)…/소년아, 인생 별것 아니니/오직 네 길로만 가거라."

2000여 년 전 청동기시대 상남동에 조성된 남방식 지석묘. 상남동 고인돌이다. /이일균 기자
2006년 6월 10일 자 '골목과 사람 - 10년만에 천지가 바뀐 창원 상남장'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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