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김주열 열사 추모식, 나머지 희생자 기록 부족

해마다 4월 11일 김주열 열사 추모식이 열린다. 3·15의거 열사는 모두 14명이지만 별도 추모식은 김주열 열사가 유일하다. 나머지 13명은 잊혔고, 기록조차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오늘날 민주주의를 있게 한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자유당 부정선거에 맞선 학생과 시민이 총포에 쓰러졌다. 14명이 숨졌고, 250여 명이 경찰이 쏜 총에 다치거나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 열사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횃불은 타올라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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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중앙부두 앞에 떠오른 김주열 열사 시신.

강융기, 김삼웅, 김영길, 김영준, 김영호, 김용실, 김종술, 김주열, 김평도, 김효덕, 오성원, 전의규, 조현대, 김동섭 등이 의거 '14열사'다.

당시 마산고 1학년 김용실의 집에는 투표용지가 유권자 숫자대로 나오지 않았다. 김용실의 아버지는 동사무소에 가서 거세게 항의했다. 김용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분개했다. 그날 저녁 8시께 김용실은 어머니에게 '잠시 구경하고 올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당시 유행하던 헌 워커 끈을 조여 매고 시계를 보더니 '아직 빠르다'고 중얼거렸다. 그때 모습이 가족들 기억 속 마지막이다.

경찰이 쏜 총탄에 가슴을 맞고 숨진 오성원은 시신을 수습해 줄 가족마저 없었다. 조실부모한 그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서 시내 다방을 전전하며 구두를 닦았다. 동료 구두닦이 두 명이 오성원의 시신을 거뒀다.

14열사를 기억할 기록이 많지 않다. 2010년 출판된 3·15의거 증언록 <우리는 이렇게 싸웠다>에는 김주열 열사 어머니 권찬주 여사, 김용실 열사 어머니 이명선 여사와 누나 김옥주 씨, 김영준 열사 형 김영필 씨 증언만 남아 있는 정도다. 

3 15의거기념사업회는 열사 대부분이 당시 10대 소년 이어서 희생 이전 기록이 많이 없었던 점, 1993년 창립할 당시 이미 3·15의거가 30년 이상 지나면서 유족 소재를 모두 파악하지 못한 점, 생존 유족은 대부분 더 어렸던 동생이라 기억이 흐릿한 점, 목격자를 찾기 어려웠던 점 등을 이유로 기록 작성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김주열 외 열사는 매년1월 1일, 3월 14일, 4월 24일 합동으로 참배·추모제·위령제 등을 치른다.

남기문 3·15기념사업회 사무차장은 "기념사업회 창립 당시 몇몇 열사 추모사업회가 추진됐었지만 결국 흐지부지됐다"며 "특히 주변 사람이 거의 없었던 오성원 열사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1960년 3월 마산에서 독재정권에 맞선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민주주의가 이만큼 성장했을까. 3·15의거 김주열 열사 추모식은 11일 낮 12시 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앙부두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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