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완성한 정책 정당한 권력 주장
지방선거 분권 실현 문화 공약 제시되길

세종은 1418년 조선의 4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조선 건국 불과 26년 되던 해였다. 만약 2018년 올해가 세종이 즉위한 해라면 1992년에 고려가 멸망한 것이니, 얼마나 가까운 과거인지 짐작할 수 있다. 모르긴 해도 세종이 임금이 됐을 때 30대 이상은 고려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왕씨가 쫓겨나고 이씨가 지배하는 조선, 얼마나 지속될까 의문을 갖지 않았을까?

세종이 등장하기 전 26년 동안 신생국 조선은 평탄한 날이 거의 없었다. 건국 이념을 세우고 조선을 실제로 설계한 실력자 정도전이 불과 6년 만에 이방원에게 제거됐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태조가 직접 책봉한 세자와 나머지 유력 왕자들도 제거하고 본인이 직접 제위에 올랐다. 태종은 재위 중에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은 물론 도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면 누명이라도 씌워 없애버렸다. 왕비의 형제와 아버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태종이 손에 피 묻히기를 주저하지 않은 덕분에 세종은 정적이 제거된 평화로운 환경에서 왕위에 올라 마음껏 치세를 펼칠 수 있었다고 평가하는 시각이 있다. 과연 그렇기만 할까? 우리도 역사를 겪어봐서 알지만 정적이 제거한다고 제거되는 존재인가? 칼을 쓰면, 게다가 억울한 죽임을 반복하면 그만큼 원한도 쌓이는 법인데, 세종은 무주공산이 됐다고 흔쾌하기만 했을까?

고려 멸망 겨우 26년, 구관이 명관이라는 푸념이 언제든지 세상을 휩쓸 수 있던 시기였다. 세종이라고 두렵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궁궐 안팎에 뿌린 핏자국이 마냥 고맙기만 했을까? 물론 상상이지만, 세종은 아버지와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왕권을 지키기 위해 잠재적 정적을 압박하는 대신 권력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홍보해 지지기반을 확대하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이때 세종의 선택은 바로 '문화정책'이었다.

세종은 4군 6진을 개척하고 대마도를 정벌한 뒤 즉위 2년 차에 집현전을 설치했다. 세종이 앞으로 펼쳐나갈 문화정책의 싱크탱크였다. 곧이어 장영실 등을 중용해 천체 관측기구인 혼천의와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을 개발했고, 농사직설을 보급해 농업 혁신을 도모했다. 내 생각에 세종의 문화정책 중 백미는 악보를 표준화한 정간보를 개발한 것이다.

당시 집현전에는 훗날 3대 악성으로 추앙받은 박연이 있었다. 당시 불완전했던 악기들을 표준화시키고 정간보를 개발해 표준기보법을 완성했다. 조정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당악에 대비한 우리 고유 음악)을 폐지하고 중국 고대 궁중음악을 재현한 아악을 연주토록 했고, 회례연 때 있던 춤도 기생이 아니라 무동(舞童)이 추게 함으로써 유교 의례적인 성격을 강화했다.

세종이 박연을 통해 음악에 특별히 공을 들인 건 본인 취향 때문이 아니라 유학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논어 태백편에서 공자는 "시로 일깨우고, 예로 일어서며, 음악으로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고 말했다. 유학에서 음악은 군자가 이뤄야 할 최고 경지였다. 다시 말해 음악을 완성한 권력이야말로 유학 세계에서 가장 정당한 권력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은 이때 기반을 닦은 음악으로 집권 27년 차(1447년)에 <용비어천가>를 지어부른다. 일종의 화룡점정이었다. 고려를 지우고 세워진 조선의 정당성을 세종이 문화적으로 증명하지 않았다면, 과연 조선은 이후 400여 년을 기약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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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뒤에 지방선거가 열린다. 예전 선거와 다르게 '분권'이 가장 큰 화두가 되고 있다. 중앙정부가 마련한 기준으로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시대를 벗어나 각 지역과 도시가 주체적인 자기 권력을 갖게 되는 첫 번째 시대가 되지 않을까? 지방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달리는 선수들은 이 시점에 세종의 문화정책을 되새김질 했으면 좋겠다. 권력 자체를 탐하는 데서 나아가 분권의 정당성을 시민들에게 어떻게 문화적으로 입증할 것인지를 공약으로 제시했으면 좋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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