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한 일상이 주는 커다란 위안
지그재그로 의령읍내 걷기
함안층빗방울자국·의령탑 충익사·의병박물관 둘러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 순간의 소중함·의미 깨달아

봄기운이 뚜렷한 날씨에 1층이라서 그랬을 겁니다. 점심때 찾은 장례식장은 밝고 포근합니다. 의령에 사는 고등학교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길입니다.

"오래 투병하셨으니 마음 준비는 하고 있었다." 핏발 선 눈으로, 친구는 괜찮다고 말합니다.

"그래…, 근데 진짜 슬픔은 나중에 올지도 몰라. 장례 다 치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잖아. 밀린 업무 좀 보고 한숨 돌리면서 밖에 나와 담배를 피워 문 순간, 왈칵하고 눈물이 쏟아질 수도 있거든."

"응, 그럴 수도 있겠네."

이런 말을 이해하는 친구라서 좋습니다. 걸걸하면서도 속 깊은 게 '의령'이란 말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던 녀석입니다. 죽은 자를 위한 장소에서 산 자들이 따뜻한 대화를 나눕니다. 산 자에게 죽음은 아주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아주 먼일입니다. 느낌 여행 두 번째 여정은 이렇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상실'과 함께 시작합니다.

▲ 곽재우 장군과 휘하 장군17명을 모신 충의각.

장례식장을 나와 의령군청으로 향합니다. 의령 호국공원을 정수리에 인 낮은 산등성이 봉무산(鳳舞山)이 군청 뒤편과 이어져 있습니다. 옛 이름은 덕산(德山)으로 옛 의령 고을 진산(鎭山)이지요. 그만큼 중요한 산이었습니다. 옛 명성이 어땠거나 지금 봉무산은 그저 묵묵히 의령 도심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산 허리에 여세병(1897~1971), 이억근(1893~1944) 두 애국지사 묘소를 품고서 말이지요. 잠시 애국지사 묘소를 덤덤히 바라봤습니다.

의령군청은 말끔하고 소담한 관공서 건물입니다. 군청에서 바라보면 정면 도로를 따라 의령천 너머 의병탑이 보입니다. 일직선으로 가면 한걸음에 닿을 것 같지만 저는 지그재그로 의령읍내를 두루 돌아다닐 생각입니다.

▲ 의령 서동리 함안층빗방울자국 표지석.

의령읍 중심은 아무래도 서부마을이겠습니다. 법정동은 서동(西洞)에 속합니다. 마을회관 안내판을 보니 의령 고을 읍성 안에 있었고, 동헌, 객사나 창고, 현감이나 관원 사택도 이 마을에 있었네요. '잠내 또랑'이란 물길이 동네 가운데를 흘러서 빨래도 하고 물도 길어 쓰고 했던 모양입니다. 도심이 형성되면서 물길 위로 길이 덮여버렸고요.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니 드문드문 도랑이 드러난 곳이 있습니다. 아담한 하천입니다. 그 옛날 하천변에 쭈그리고 앉아 빨래도 하고 그릇도 씻고 왁자했을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따뜻한 풍경을 잃었지만, 물길은 언제나 그렇듯 묵묵히 흐르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주는 어떤 교훈 같은 것을 담고서 말이지요.

하교 시간인지 군청 옆 의령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습니다. 학교 주변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는 아저씨를 유심히 살피기도 하고 골목길 느긋한 고양이가 하는 짓을 오랫동안 관찰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삼삼오오 왁자하게 교문 나서는 아이들은 여지없이 근처 문방구나 편의점으로 향합니다. 간단하고 달콤한 간식거리를 사먹겠지요. 나이를 먹으면서 자주 안 찾게 되는 맛이 달콤함입니다. 달콤함이 싫은 게 아니라 입맛이 덤덤해진 것이겠습니다. 오랫동안 혹사당한(?) 입이 선택한 덤덤함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렇게 가만히 풍화되는 일이기도 하겠습니다.

▲ 의병탑.

가만히 풍화된다는 생각을 한 것은 서동리 함안층빗방울자국을 보면서입니다. 의령군청에서 왼편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오랜 땅이 가만히 풍화되면서 1억 년 전의 본질을 드러낸 곳입니다. 화석 주변 지형이 태곳적에는 호수 바닥이었나 봅니다. 마른 호수 바닥에 세찬 비가 송송이 박혀 들어간 모습과 빗물이 모여 만든 웅덩이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1억 년 전 내린 비와 그걸 보는 지금 이 순간 사이에 있었을 오랜 세월을 가늠하지 못해 한참을 머뭇거립니다.

머뭇거리다 결국 뒤돌아 나옵니다. 도로를 건너다 납작하게 찌부러진 음식용 집게를 만납니다. 몇 번이나 차 바퀴에 깔렸는지 바닥에 거의 붙어버린 집게야말로 오히려 1억 년 전 빗방울보다 실감 나는 화석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걸걸하고 속 깊은 친구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지금 여기, 곁에 바짝 다가온 상실이야말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의미가 클 테지요.

발걸음은 어느새 의령 전통시장을 지나 의령천에 다다릅니다. 의령천은 의령읍 남쪽을 서에서 동으로 흘러 남강으로 합류합니다. 합류지점이 의령의 관문인 정암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정암철교 아래 솥바위(정암·鼎巖) 주변에서 임진왜란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왜적을 물리쳤습니다. 의병교를 따라 하천을 건넙니다. 의령군청에서 정면으로 뻗은 도로를 따라 직선으로 달리면 바로 의병교에 닿습니다. 의병교를 지나면 의병탑입니다. 의병교를 지나면서 왼쪽으로 보이는 둔치는 크기가 인상적인 의령 큰줄댕기기가 열리는 곳입니다.

▲ 수령 500년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충익사 내 모과나무.

의병탑은 의령의 상징건물입니다. 만날 정면에서만 바라보다가 더 다가가 보기로 합니다. 탑 아래에 서서 보니 첩첩 쌓인 고리들이 더욱 독특해 보입니다. 탑 뒤편에는 건축 내력이 적혀 있습니다. 1972년에 세운 탑이네요. 탑 정면에 있는 '의병탑'이란 글자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적은 거랍니다. 탑을 둘러보고 나오는 데 우뚝하고 멈춰 섭니다. 의령군청과 그 뒤 산세가 훤합니다. 이 각도에서 의령읍내를 바라본 적이 없기에 신선하고 인상적입니다. 그러고 보니 의령군청이 의병탑을 바라보고 선 게 아니라 의병탑이 의령군과 의령군청을 바라보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의병탑에서 나와 충익사와 의병박물관을 돌아봅니다. 충익사는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휘하 장군 17명과 무명 장수들을 모신 사당입니다. 숙연한 마음속에서도 눈길이 가는 것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충익사 마당에 있는 모과나무와 의병박물관 앞 공원에 있는 고인돌이었습니다. 모과나무는 수령이 500년으로 우리나라에서 조사된 것 중에 가장 오래됐다고 합니다. 고인돌은 의령 지역 청동기 시대를 증명하는 것들입니다. 역시나 지금 여기, 직접적으로 와 닿은 것에 마음이 가기 마련인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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