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판 '우생순' 꿈꾼다

지난해 10월 23일 충북 청주대 석우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전국체전 핸드볼 여고부 준준결승전. 7명의 선수가 교체 한 번 없이 쉼 없이 코트를 누빈다. 주인공은 경남체고 여자 핸드볼부. 지난 2016년 창단한 팀은 2017 전국체전에 1·2학년 선수 7명만이 참여했다. 더군다나 골문은 핸드볼을 시작한 지 고작 두 달째인 선수가 맡았다. 3학년이 주축인, 선수 폭이 넓은 다른 팀에 비해 체력적으로나 기량면으로나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근미 코치나 예인 지금이나 '정신력'을 강조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교체 여유가 없다. 남들보다 두 배로 뛰자'고 늘 말했죠. 갑작스럽게 골키퍼를 맡은 선수도, 손가락 부상 때문에 신음했던 선수도 모두 하나 돼 이 악물고 뛰었어요." 이 코치 주문이 통했을까. 그날 한 수 아래라는 평을 받아온 경남체고는 인천비즈니스고를 상대로 37-34 승리를 챙기며 동메달을 확보했다. 이근미 코치가 창단 2년 만에 일궈낸 경남판 '우생순'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지도자

이근미 코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핸드볼에 입문했다. 어린 나이에도 키가 크고 핸드볼에서는 드문 왼손잡이였다. 실력과 달리 선수 시절에는 메달과 큰 인연이 없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전국대회에서 3위에 오른 것이 유일하고, 실업선수 생활 동안 베스트 11에 든 것이 전부다. 현역선수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간절하게 소망하는 태극마크도 달았다. 실업 3년 차에 발탁돼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출전 기회도 잡았지만, 올림픽을 앞두고 부상을 당해 기회를 놓쳤다. 그렇게 실업무대 6년을 누비다 1997년 무릎 십자인대 파열을 당했고 몸담았던 청주시청이 해체되면서 핸드볼 코트를 떠났다.

이근미 코치가 핸드볼 코트로 돌아온 건 2004년이다. 모교였던 마산 양덕여중 핸드볼팀 코치로 부임한 것.

지도자로서 이 코치는 완전히 달랐다. 이 코치는 때로는 호랑이같이, 때로는 자상한 어머니처럼, 때로는 묵묵히 후배들을 지켜주는 선배가 되어 팀을 이끌었다.

부임 첫해 최소 7명이 필요한 종목 특성에도 양덕여중 팀 선수는 5명이 전부였다. 부랴부랴 선수 수급에 발 벗고 나선 이 코치. 팀이 안정을 찾자 곧 성과가 뒤따랐다.

이 코치 지도로 양덕여중은 2005년 전국종별선수권대회 준우승을 차지했다. 2006년과 2007년에는 잇따라 2관왕의 영광을 재현하기도 했다. 곧 '양덕여중 황금시대'도 열렸다.

2014년 양덕여중 핸드볼팀은 '제43회 전국소년체전'에서 대회 2연패를 차지하면서 최강 면모를 다졌다. 특히 2013년 3월 열린 중고 핸드볼 선수권대회부터는 35연승을 내달리며 최근 출전한 7개 대회의 트로피를 모두 휩쓸기도 했다. 이때의 연승 행진은 41연승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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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미 코치와 경남체고 여자 핸드볼부. / 박일호 기자

이 코치는 당시 연승 비법이 '기초체력'이라고 회상했다.

"성실하고 근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 지도철학이에요. 지도 스타일상 다른 학교 팀보다 운동량이 많아 선수들 근성이 없으면 훈련을 진행하기 어렵습니다. 당시 새벽에 운동을 시작해 야간까지 훈련을 이어갔어요. 역시 기본은 체력훈련이었습니다."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양덕여중과 천안여중 경기가 있었던 2005년 이 코치는 이 코치는 만삭의 몸으로 선수들을 지도했다. 팀을 맡은 지 겨우 2년 차였을 때. 병원에서는 안정을 취하라고 했지만 승리욕을 숨길 수 없었다. 그해 소년체전에서 양덕여중은 8강에서 탈락했지만 이 코치 투혼만큼은 빛을 발했다.

2015년까지 양덕여중을 이끌던 이 코치는 이듬해 경남체고로 옮겨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침체에 빠진 경남 여고부 핸드볼 전국 상위권으로 도약과 연계육성 틀을 마련에 힘을 보태기로 한 것. 역시 시작은 어려웠다. 지난해 10월 창단 7개월여 만에 참가한 전국체전 1회전에서 경남체고는 강원 황지정보고에 22-36으로 패했다. 당시 황지여고는 전국체전 3회 연속 우승에 도전하던 팀이었다.

주눅이 들만도 했건만 선수들도 이 코치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경기에서 경남체고는 시작 30여 초 만에 황지정보고 골망을 흔들었다. 이어 추가 골을 넣으며 2-0으로 앞서갔다.

하지만 전력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점수는 벌어지기 시작했고 경남체고는 13-19로 전반을 마쳤다. 후반 들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빠른 속공으로 잇따라 골을 성공, 22-36으로 승리를 쟁취했다.

뼈아픈 패배에도 이 코치는 선수들을 격려했다. 이 코치는 "당시 완성되지 않은 전력으로 전국 최강팀에 도전했지만 좋은 성과를 거뒀다"며 "이후 전국대회 4강권을 목표로 하고 훈련에 매진했다"고 밝혔다.

이 코치 바람은 결국 이뤄졌다. 지난해 전국체전. 1·2학년만으로 구성된 경남체고 핸드볼팀은 인천비즈니스고를 상대로 승리했다. 3학년이 주축인, 다른 팀에 비해 체력적으로나 기량면으로나 부족할 수밖에 없었지만 똘똘 뭉친 팀은 기적을 만들었다. 경기 엔트리도 딱 7명. 만약 한 명이라도 다치게 되면 경기를 포기해야 했기다. 선수들은 코트에서 넘어져 허리가 아파도, 숨이 턱에 차올라도 참고 견디며 뛰었다. 상대 팀은 틈틈이 선수를 교체해가며 체력을 안배했지만 경남체고 팀에 그런 호사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뛰고 던지고 또 뛰었다. 선취점을 얻었고 전반 초반 4-1까지 점수 차를 벌렸다. 21-16으로 전반을 마친 경남체고 팀은 후반에도 리드를 내주지 않았다. 후반 중반을 넘어가자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투지를 잃지 않고 코트를 누볐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들리고. 모두가 원하던 영화 한 편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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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체육고등학교 여자 핸드볼부 이근미 코치와 선수들. /박일호 기자

경남체고에서 써 내려갈 역사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창원시 양덕여중 체육관에서 훈련 중인 선수들을 다시 만났다. 가볍게 코트를 누비다가도 코치 호령 한 번에 매서운 눈빛을 내뿜는 선수들. 지난해 전국체전 때보다 한결 여유로우면서도 더 단단해진 모습이다.

2015년 도내 유일 여고부 핸드볼부였던 무학여고 핸드볼부가 해체하면서 경남 여자핸드볼은 한차례 위기를 맞았다. 연계육성 발판을 잃었고 선수들의 역외 유출도 우려됐다. 다행히 이후 도교육청과 도체육회가 새 팀을 물색했고 2016년 1월 경남체고가 팀 창단을 결정했다.

그동안 선수 부족에 힘들어하던 경남체고 여자 핸드볼부는 올해 신입생 3명을 받았다. 현재 팀원 구성은 1학년(이가은·정은솔·신다빈) 3명, 2학년(정현희·안슬비) 2명, 3학년(박지원·노희경·윤예진·전유주·김수현) 3명이다. 전문 골키퍼도 생겼다. 학년별로 고루 분포된 선수단, 한층 높아진 실력. 이근미 코치는 올해 전국체전에서 4강 이상을 목표로 삼았다.

"훈련은 실전 경험 쌓기에 주력하고 있어요. 중·고 여자 핸드볼 선수가 한데 모여 운동하는 이유도 경험을 공유하기 위함이죠. 체전 때까지 실업팀·남중 핸드볼부와 시합을 이어나갈 계획이에요. 핸드볼 특성상 골키퍼 역할이 정말 중요한데, 해당 선수는 특훈을 하고 있고요."

그렇다고 마냥 장밋빛 미래만 전망할 순 없다. 전용 훈련장이 없고 연계육성이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점은 경남체고, 나아가 경남 핸드볼이 안은 문제다. 경남체고 여자 핸드볼 팀은 1년 넘게 매일 1시간가량 차를 타고 진주에서 마산으로 넘어와 운동을 하고 있다. 실전 감각을 키우려면 '올 코드' 훈련장이 필요한데 이를 충족하는 마땅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올해 졸업생이 5명이나 된다는 점도 부담이다. 이들의 빈자리를 채울 신입생은 현재로선 2명이 전부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핸드볼은 여전히 비인기 종목이자, 불모지입니다. 초·중·고를 잇는 연계육성이 반드시 필요한 까닭도 여기 있는데, 실제 초등학교 때 핸드볼을 시작했더라도 중학교에 진학하고선 그만두는 선수가 많아요. 인프라 확대가 절실합니다."

올해 졸업하는 5명의 선수는 실업팀 입단·대학 진학 혹은 다른 스포츠 영역으로 발판을 넓히기에 충분한 기량과 역량을 갖췄다는 평가다. 이 코치는 "경남 핸드볼이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 만큼 부모님들의 인식 변화도 필요해 보인다"고 밝혔다.

숱한 난관을 거치며 선수들은 뭉치고 팀은 더 강해졌다. 오전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이어지는 긴 훈련도 '같은 목표'가 있기에 견딘다. 경남체고 여자 핸드볼부 주장 박지원 선수는 이를 자신감으로 바꿨다.

"올해 목표요? 당연히 전국체전 우승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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