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다석 강독(多夕 講讀) (24) 증석의 말 한마디에 수무족도(手舞足蹈)하며 격앙

<국역 우곡선생 문집> 제1편

김온달 cpje@naver.com 입력 : 2018-04-05 13:47:59 목     노출 : 2018-04-05 13:54:00 목

2~3년 전, 방안 책꽂이에 오랫동안 꽂혀있던 <국역 우곡선생문집(國譯 愚谷先生文集)>을 우연히 봤다. 우곡선생이 이 지역 창원 사람으로 도학(道學)에 대한 공부가 아주 높았던 점에 끌려 그 후 가끔 이 책을 펴게 되었다.(실은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도를 높이 공부한 사람은 모두 국내에 이름난 선생들로만 여겼다.) 어느 날 문집의 글 가운데 "우곡선생이 '기수에서 세수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다'라는 <논어 선진편>의 구절을 공부하다 말끝에 감흥을 얻었다"는 우곡 행장(行狀)을 보고는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왜냐면 우곡선생은 30대 후반에 졸(卒)한 단명(短命)이었는데, 나이 쉰을 넘기고도 <논어>의 말마다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는 범부로서 가슴속에 두려움과 함께 공경의 맘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다시 기회가 되면 이 책을 정독하기로 마음먹었다가 이번에 <다석 강독>을 통해 우곡선생을 세상에 알리고 더불어 공부를 더 해볼 요량으로 이 글을 시작하게 된 연유를 밝힌다. 

우곡 박신윤은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어려서 창원 사화동으로 이주하여 평생을 살았다. 모친의 뜻에 따라 과거시험에 몇 번 나갔으나 실패하자 25살 때 입신출세에 뜻을 접고는 공자로부터 시작하여 송대(宋代) 염락관민학파(濂洛關閔學派)가 완성한 유가(儒家)의 성리학, 즉 도학에 매진하여 이미 30대에 큰선비가 되었다.

그가 죽자 당시 사림(士林)은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위패를 서원에 모시고 나라에 고하여, 호조좌랑(戶曹佐)에 추증(追贈)케 했다.

우곡의 한문문집을 한글로 옮긴 박태성 박사는 "옛 창원대도호부는 삼진, 웅천, 북면, 동면, 서면, 구산면, 칠원면 일부를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인데, 이 지역의 많은 서원(書院)에 배향(配享)된 분 중에 이 지역 출신이면서 봄가을 향사(享祀) 때 국가에서 향(香)을 하사하여 제사를 드리도록 하는 향현사(鄕賢祠)가 있는 곳은 유일하게 우곡선생을 배향한 운암서원(雲巖書院)뿐이다"고 밝혔다.

사향(賜香)서원은 사액서원(賜額書院)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름난 선생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징표라 할 수 있다.

창원은 예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경북 안동 등에 못지않게 역대 많은 선생들이 거쳐 갔거나 배출된 곳이다.

조선 중기의 한강 정구(寒岡 鄭逑)를 모신 마산 교방동 회원서원(檜原書院)이 있고, 북면 달천 계곡에는 정구에게 배운 미수 허목(眉 許穆)의 유적이 남아있다.

국내에 이름난 거유(巨儒)는 물론, 우곡선생과 같은 시기에 살았던 창원 동읍의 곡천 김상정(谷川 金尙鼎), 근세 일제 감점기의 유학자인 동읍의 눌재 김병린(訥齋 金柄璘)선생 등 헤아릴 수 없다.

유홍준 교수가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라고 꼬집었듯이 곳곳에 고수들이 숨어 산다는 뜻 그대로 더 많은 현인군자들이 있었지만 더 알지 못해 송구할 따름이다.

도학(道學)은 조선을 지탱한 큰 사상의 흐름이기는 했으나 당파싸움에 휩쓸려 외려 도학의 본령이 훼손된 측면이 많다. 그러나 그 가운데 시세를 따르지 않고 제대로 공부하고 실천한 선비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우곡 박신윤을 보게 되면 이러한 생각이 지나친 표현이 아닌 줄 독자는 알게 될 것이다.

우곡이 감흥을 얻었다는 <논어 선진편>을 먼저 보기로 하자.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박신윤 묘표(墓表)'에 따르면 신윤이 일찍이 <논어>를 읽다 증점(曾點)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의 바람을 쐬며 노래하고 돌아온다"는 대목에서 문득 스스로 격앙하여 유연히 자득하는 정취가 있었다.

우곡이 '격앙(激)하고 유연(悠然)히 자득(自得)'한 까닭을 옛글을 통해 알아보면 그만한 연유가 있다.

'격앙'이란 감정이나 기운이 격렬히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또 '유연'이란 도연명의 시 '동쪽 울타리 밑 국화를 따들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네'의 그 '유연'을 의미한다.

이 말은 우곡이 글을 보다 격앙하여 태연하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는 뜻으로 풀이가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가 이 구절을 보고 '유연히 깨달은 경지'에는 가지 못하더라도 그 느낌이 무엇인지를 알 양이면 증점이 그런 말을 한 전후 문맥을 먼저 보아야한다.

<논어 선진편(論語 先進篇)>이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다고 해서 날 빙자하지 말라. 너희들은 앉으면 하는 소리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들 하는데 만약 어떤 사람이 알아준다면 무엇을 하겠느냐?" 자로(子路)가 대답했다. "천승지국으로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 있어 군사적 침략을 받고 이어 기근까지 발생하더라도 제가 다스린다면 삼 년 만에 그 나라 백성들을 용기가 있고 도의를 알게 하겠습니다." 선생께서 빙긋이 웃었다. "구(求)야 너는 어떠냐?" 구가 대답했다. "사방 육칠십 리 혹은 오륙십 리 되는 지역을 제가 다스린다면 삼 년 만에 그 지역 백성들을 풍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악 같은 것은 군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또 적(赤)이 대답하기를 "제가 이런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은 아니고 이렇게 되도록 배우고 싶습니다."

"점아 너는 어떠냐?" 하자 점은 슬(瑟)타기를 늦추어 멈춘 다음 퉁 하며 슬을 내려놓고 일어나서 "세 사람이 여러 가지를 잘 갖추어서 훌륭하게 대답한 것과는 다릅니다. 늦은 봄에 봄옷을 잘 차려입고 갓을 쓴 어른 대여섯 명 및 아이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에서 세수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쐰 다음 노래를 읊조리고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했다. 공자께서 '와' 하고 찬탄하면서 "나는 점의 말에 찬동하노라!"라고 말했다.

이 구절의 뜻을 풀어보기 전에 증점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그의 자(字)가 석(晳)이라 증석(曾晳)으로 알려져 있다. 증삼(曾參)의 부친이다. 증자(曾子)로 존칭되는 증삼은 '하루에 세 가지를 돌이켜 살핀다'는 일일삼성(一日三省)과 '우리의 도는 하나로 꿸 뿐(一以貫之)이며 그것은 곧 충(忠)과 용서(恕)다'는 인식으로 유명하다.

공자의 도통(道統)은 문인 증삼에서 손자 자사(子思)로, 또 맹자로 이어지다가 먼 훗날 송대에 와서 성리학으로 발전한다.

왕대밭에 왕대 난다는 말처럼, 증석에게는 아들이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아버지로서의 자질을 가졌음을 스승 공자가 인증하였다는 것을 이 글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러면 어찌하여 증석의 생각이 공자의 찬탄을 이끌어 내었는가? 증석은 자기보다 앞서 공자의 물음에 답한 자로(子路), 염유(有), 공서화(公西華)와는 생각의 뿌리가 다르다.

자로를 비롯한 앞의 세 사람은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관직에 올라 백성을 다스리거나 혹은 그런 능력을 배우겠다고 하였다. 증석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남들이 얘기할 때 거문고를 타며 가만히 듣고 있다가, 스승이 자기를 지목하여 묻자, 곧바로 연주를 놓고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여러 가지를 갖추어 훌륭한 생각을 한 세 사람과 저의 생각은 다르다'고 부드럽게 잘라 말한다.

무엇이 다른 차이인가? 남을 부리고자 하는 것과 자기를 다스리고 싶은 그 마음이 다른 것이다.

증석은 늦은 봄이라 하여 때철를 알았고, 봄옷과 갓을 잘 갖추어 입어 예(禮)를 내세웠으며, 어른과 어린이가 동행하도록 하여 사람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버린 것이다. 기수에서 세수함은 몸을 정결히 하여야 한다는 뜻이고, 무우에서 바람을 맞음은 정신적 기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두가 하나가 된다면 입에서는 자연 기쁨의 노래가 흘러나올 수 있지 않을까?

증석의 이 말씀은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배움은 자신을 밝히기 위한 공부여야 한다는 <논어>의 가르침과 일치하며, 따라서 위정자가 되어 백성을 다스리고 싶어 하는 자로(子路) 등과는 그 뿌리가 완연히 다른 것이다.

우곡선생이 이 대목의 글을 읽고 격앙하여 절로 깨달음이 있었다고 한 숨은 뜻은 따로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곡 역시 그의 아호처럼 어리석게 골을 지키면서, 남들이 알든 모르든 개의치 않는 우곡(愚谷)에 작은 집을 짓고 스스로 자기를 밝히려고 한 점에서는 증석이 '나의 생각은 다르다'고 한 것과 일맥상통함을 느낄 수 있다. 왜냐면 참된 생각은 어려운 철학이 될 수 없고, 가까운 데를 챙길 줄 아는데 그 요점이 있기 때문이다.

다석 가로되, "무본(務本)입니다. 밑동에 힘쓰는 것입니다. 유교의 정신은 온통 '무본'입니다. 대통령부터 백성까지 이 밑동에 힘써 나가고 서로 권하면, 곧 '무본'에서 차례를 따져 나가면 갈 곳에 거의 가깝게 들어서는 것이 됩니다.

고지욕명명덕어천하자(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옛날 명덕을 천하에 밝힌 분'이 누구인가에 대해 공자는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을 표준으로 삼고, 그분을 본받아 자기 속의 명덕을 밝히고, 그다음에 제삼자에게 그 밝은 마음이 미치게 하였습니다. 천하백성을 제 몸같이 알아야 하는데 이것이 친민(親民)입니다."

다석의 풀이대로 유교의 정신은 근본에 힘을 쏟는 것이고, 그 근본은 마음속에 있는 밝은 덕, 즉 '속알'을 밝혀내는 데 있다. 또한 목민(牧民)에 있지 않고 친민(親民)에 있다. 증석이 그렇고 우곡 또한 자신이 배우고 익힌 도학(道學)을 지키며 살았기 때문에 증석의 말 한마디에 수무족도(手舞足蹈)하며 격앙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우곡이 느낀 감흥의 비밀한 뜻은 자로 등 세 사람이 천하를 다스리는 권세(權勢)만을 우선시한 데 반해, 증석이 자신의 속알을 밝히려 한 데 공감한 것일 게다.

신문 구독을 하지 않고도
경남도민일보를 응원하는 방법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http://www.idomi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