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봄, 경남 전체가 '대한독립만세'로 물들다

3·1운동은 일제 착취에 맞선 전 민족적인 항쟁이었다. 특히 일본과 인접한 까닭으로 더 철저한 착취를 당했던 경남에서 항거가 더 처절했다. 이번 편에서는 경남지역 숱한 항쟁 가운데 참가자 숫자가 1000명을 넘는 대규모 시위를 정리해봤다.

창원장 시위: 1919년 3월 23일 현재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창원장에서 6000명에 이르는 군중이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주동자들은 창원보통학교 내 대수정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창원장으로 들어와 시위를 일으켰다. 4월 2일에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는데 인원은 1차보다 많은 최대 7000명에 달했다.

마산시내: 3월 3일 오전 11시경 무학산에서 열린 고종 황제 국장 행사에 운집한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가 뿌려지고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대는 마산 창동 구 시민극장 인근으로 이동해 학생들과 합류, 최대 4000명이 참석한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3월 25일 장날에 모인 군중들은 오후 2시께 석전동에서 출발해 당시 북마산파출소, 오동동 형무소(구 한국은행 마산지점)으로 진출했는데 약 3000명이 참여했다. 당시 마산 인구는 1만 5000명에 불과했다. 3월 31일에는 약 3000명에 달하는 군중들이 마산형무소를 포위하고 애국지사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때 마산형무소 조선인 간수 박광연이 제복을 벗어 던지고 군중 속에 들어가 만세를 부르는 일도 있었다. 3·1운동 당시 마산에서는 총 7~8차례 대규모 집회가 일어났고, 창신학교 학생들이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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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당시 일제 경찰에 의해 가장을 잃은 가족.

마산 삼진의거: 3·1운동 4대 의거 중 하나로 불리는 대규모 시위였다. 4월 3일 진전면, 진북면, 진동면민 7000명이 집회를 열고 진전면 양촌에서 진동면에 이르는 약 10km에 이르는 거대한 인간 띠를 형성하고 행진했다. 진동면과 진북면의 경계인 사동교에서 일제 군경의 발포로 8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22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마산 진동의거: 한편 삼진 중 한 곳인 진동장터에서는 같은 시간 삼진의거와 별개로 2천 명의 시위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하고 있었다. 일제는 삼진의거를 막기 위해 모든 병력을 보냈으므로 운동은 전혀 방해받지 않았다. 군중은 삼진의거 참가자들과 합세하기 위해 사동교까지 진출하려 했으나 삼진의거 유혈사태 소식을 듣고 시위대를 해산했다.

진주읍 의거: 진주에서는 3월 18일을 기점으로 읍내 3곳에서 동시에 시위를 일으켰다. 이미 많은 군중들이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진주읍내로 들어온 상태였다. 3월 18일 오전 11시 비봉산 위에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를 기점으로 진주성, 진주재판소 인근, 진주장터에서 동시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오후 4시경 참가자 숫자는 1만 명을 넘어섰고, 당시 경상남도 도청 청사까지 진출했다. 이때 기생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3월 19일, 진주읍내 모든 상점이 철시한 가운데 7000명이 경남도청 청사와 경무부로 진출했다. 일제 군경이 무차별적으로 군중들을 공격하자 군중들은 돌팔매질로 맞섰고 시위 규모가 1만 명을 넘어섰다. 20일, 21일에도 수천 명이 군중이 들고 일어났다. 진주읍내에서는 5월까지 20회에 걸쳐 대규모 집회가 일어났으며 약 3만 명의 주민들이 참여했다.

진주 정촌면: 한편 진주읍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3월 18일 정촌면에서도 5000명이 집결해 시위를 일으켰다.

진해 웅동 웅천시위: 두 지역에서 동시에 만세시위가 일어났으며 경남도장관(도지사)의 보고에 따르면 약 2000명이 참여했으며 32명이 현장에서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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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소재 창원읍민만인운동비.

통영: 통영에서는 3월 10일, 13일 대규모 시위가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미리 정보를 입수한 일제 당국에 의해 무산됐다. 4월 2일 통영시장에서 최소 3000명이 운집한 가운데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이때 통영지역 기생조직인 '예기조합'도 소복을 입고 시위에 참여했다.

사천 삼천포: 학생들과 천도교(동학) 신도를 주축으로 3월 25일 삼천포공립보통학교 졸업식에 맞춰 학생들이 봉기했고 인근 시장에 있던 군중 1000여 명과 합세해 시위를 일으켰다.

김해 지역: 김해에서는 4월 2~3일 김해읍에서 수백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김해는 일제의 거점인 부산과 인접해 일제 군경의 대응이 비교적 빨랐다. 진영읍에도 3월 31일에 수백 명이 가담한 시위가 일어났다. 4월 12일 장유면 무계시장을 기점으로 3000명이 시위를 일으켰다.

양산 지역: 인근지역인 부산시위 소식을 들은 애국지사들이 3월 26일 양산 장날을 기점으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이때 참여한 인원은 약 3~4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의령읍 만세시위: 당시 의령 오일장은 규모가 컸으며 인근 주민들도 많이 거래하는 곳이었다. 3월 14일 의령장에서 3000여 명이 시위를 일으켰다. 다음 날 의령향교 앞에서 약 1000명 이상이 다시 모여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3월 16일 다시 수백 명이 시위를 일으키고 경찰서로 몰려고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의령읍내 만세 시위 다음 날인 3월 15일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나 정확한 숫자를 알 수는 없다.

창녕 영산: 창녕 영산지역에서는 3월 11일 밤 학생들을 주도로 결사대 24명이 결성됐다. 이후 수차례 만세시위에서 이들이 앞장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이들은 3월 13일, 14일 시위를 일으켰으며 정확한 숫자를 알 수는 없으나 대규모 시위로 추정된다. 3월 27일과 28일엔 영산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4대 부대로 조직해 1대는 영산 우체국을, 2대는 악질적인 일본인 집을, 3대는 일본 사찰을, 4대도 일본인 집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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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군 군북3·1운동기념탑.

함안 군북장 시위: 함안에서는 3월 12일부터 4월 13일까지 총 9차례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시위는 3월 20일 함안 군북장에서 일어난 시위다. 약 5000명이 참여했으며 일제 군경의 공격에 19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일제 군경도 12명이 상처를 입었으며, 일본인 1명이 몰매에 맞아 죽었다. 일제 측 자료에 의하면 함안 군북장 시위는 전국 만세시위 중 인명피해가 5번째로 많은 시위에 속한다. 함안지역 주민 가운데 총 1만 2000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고성 배둔리: 3월 20일 구만면 국천사장에서 애국지사들이 독립선언을 하고 인접한 회화면 배둔리 장터까지 이동해 3000명이 모인 가운데 집회를 열고 고성 곳곳에 흩어져 시위운동을 확산시켰다.

하동 지역: 하동에서는 3월 13일부터 만세운동이 시작됐으며 3월 중·하순에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4월 6일 고전면에서 민족대표 33인을 본뜬 '일신단' 33명을 중심으로 고전면 배다리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고전면 주민과 인근 금남면 주민 등 약 1000여 명이 참여했다.

산청 지역: 산청지역은 3월 19일부터 4월 3일까지 총 8곳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20일 단성 성내에서 1000여 명이 시위를 일으켰으며, 다음 날인 21일에도 비슷한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일제 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11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8명이 상처를 입었다. 이 외에도 산청읍에서도 3월 22일 1000여 명이 참여한 시위가 일어났다.

함양 장날 만세시위: 3월 28일 함양읍 함양장에서 오후 3시께 수천 명의 군중들이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다음 장날인 4월 2일 점심 무렵 3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다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대는 체포된 이들을 구하기 위해 헌병분견대를 포위하고 정문을 돌파했다. 이에 헌병의 발포로 하승현 일가가 사망 또는 부상을 당했다. 한편 과거 경남에서 항일의병 활동이 잦았던 안의지역에서도 3월 31일 안의 장날에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6명이 사망하고 15명이 부상당했다.

거창지역 항쟁: 3월 22일 거창 장날을 기점으로 만세시위를 준비했으나, 당일 아침에 거창헌병분대원들에게 주도자들이 체포됐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주민 수천 명(일제 측 기록으로는 2000명)이 농기구나 몽둥이 등 무기를 들고 가조면 장기리 만학정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거창읍으로 향하던 중 일제 헌병들과 충돌, 3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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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장터.

합천 야로면: 3월 16일 합천군 야로면에서 주민들과 해인사 승려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는데 그 숫자가 1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합천 삼가항쟁: 3월 18일 합천 삼가 장날에 약 300~400명이 시위를 벌였다. 다음 장날인 3월 23일에는 쌍백면 주민 등 약 4000여 명이 쌍백면사무소를 포위했다. 이들은 삼가읍 시장으로 행진하던 중 일제 통신시설을 부수고, 가회면민과 합세했다. 일제 군경은 역시 무차별 발포로 시위를 해산시켰다. 하지만 쌍백면, 가회면, 인근 산청군 생비량면 등 5개 면 주민들 1만 2000~3000명(일설에는 3만 명)이 삼가읍내에 몰려와 공개적인 일제 규탄대회를 열었다. 군중 숫자에 눌린 일제 헌병과 경찰은 구경을 하다 한 헌병이 연설을 하던 임종봉 씨를 쐈다. 분노한 군중들은 경찰 주재소와 우편국을 향해 들이닥쳤다. 일제 군경 또한 무차별 총격으로 대응해 13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일설에는 42명 사망) 30여 명이 부상(일설에는 100명) 당했다.

합천 대병면 창리 장날 시위: 애국지사 임상종 선생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받아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었다. 임상종과 동지들은 3월 20일을 거사일로 잡고 오후 1시 창리장에 모인 군중 4000명(일제 측 기록 3000명)은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창리 경찰 주재소로 몰려간 군중은 경찰이 총격을 하자 주재소를 공격하고 문서를 모두 소각했다. 시위대는 대병면사무소로 쳐들어가 역시 집기를 모두 파괴하고 문서를 소각했다. 당시 경상남도 보고에 따르면 "창리지역 소요는 함안, 군북 소요와 함께 본도(경상남도)에서 격렬·흉포했다"고 했다.

합천 초계면 만세시위: 3월 21일 초계리 장날에 4000명이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이 가운데 청년대원 300명은 일제의 지원을 막기 위해 초계 우편소를 습격해 모든 통신망과 기물을 파괴한 후 초계 주재소로 몰려가 경찰을 때려눕히고 경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2명이 죽고 10명이 부상당했다. 이 일로 겁을 먹은 일본인 46명은 초계면에서 합천읍으로 피난하기도 했다.

이처럼 경남 전 지역을 뜨겁게 달군 3·1운동은 4월 중순을 넘어가면서 일제의 무차별 탄압으로 더는 시위를 지속할 수 없었다. 기록상 영남지역 마지막 만세시위는 4월 29일 현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옛 마산헌병대 사파정분견소 인근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5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당황한 일본 헌병들이 무장하고 현장으로 출동했을 때에는 시위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또한 일제 군경은 여러 차례 만세시위를 겪으면서 군중들이 모이는 동선과 날짜, 주도세력 등을 파악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5월 이후 만세시위가 일어나기는 매우 힘들었다. 또한 친일반민족 지주가 주축이 된 '자제단'이 전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경남에서는 밀양, 창원, 사천, 통영에서 지부가 설립됐으며, 자제단은 항일인사를 감시하고, 시위 참가자들을 주민들과 격리시키는 활동을 했다. 자제단이 일제의 눈과 귀가 되어 주면서 대규모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후 항일인사들은 항일단체를 설립하고 해외 독립운동세력과 연계를 꾀하는 등 일제와 장기적으로 맞서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참고문헌>

- 경상남도향토사연구협의회, <경상남도 각 시군의 3·1독립운동>, 1999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적지 부산·울산·경남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2010

- 한겨레, "친일중의 친일 '3·1운동 자제단'은 누구?", 2010년 3월 1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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