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 이은상, 이승만 대통령, 김구 주석과 진해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우남 이승만 대통령은 진해 해군부대에 자주 왔으며 특히 1949년 대통령 별장이 준공된 이후에는 연말 성탄절에 진해에서 머물기도 했다. 1952년 4월 현재 북원로터리에 있는 충무공 동상 제막식에도 참석하여 축사를 했다. 백범 김구 주석은 1946년 9월 삼남지방 시찰 길에 진해를 방문하였으며 현재 남원로터리에는 친필시비가 세워져 있다. 노산 이은상 선생은 충무공 동상의 찬문을 썼고 동상제작과정에도 참여하여 충무공의 얼굴 윤곽을 잡을 때 자문하기도 했다. 해방 직후 우남과 백범 두 분이 귀국해서 1945년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안 반대운동을 함께 할 때만 해도 분위기는 괜찮았다. 그러나 우남이 단정수립을 추진하면서부터 두 분의 관계는 심각해졌다. 급기야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정치적 라이벌은 김구 선생이었다.

5.10 단독선거 이전인 1948년 3월 12일 김구 선생은 단독선거, 단독정부에 불참할 것을 선언하였고 4월에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통일정부 구성을 협상하기 위해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가 단독선거 직전인 5월 5일에 돌아왔다. 5.10 단독선거 이후에는 6월 29일부터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가 개최되었고 9월부터 미소 양군 철퇴와 평화로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주장하였다. 다음 해인 1949년 1월 18일 다시 외군 철퇴와 남북협상을 들고나오자 정부는 즉각 남북협상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결국 5개월 후인 1949년 6월 26일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맞았다. 정부에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조가(弔歌)는 김구가 암살당한 직후 이은상이 작사하고 김성태가 작곡하였다. 행진곡은 쇼팽의 장송행진곡을 다단조로 연주하였다.

역사학자 서중석 교수(성균관대학교)는 '여러 가지로 분석해볼 때 이승만 대통령이 깊숙이 관여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이 대통령은 민중의 지지를 받는 김구를, 극우반공 통치를 강화하는데 커다란 걸림돌로 생각했다. …… 김구 암살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이 모두 친일파라는 사실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1995년 12월 15일 발표된 국회 법사위 백범암살진상조사소위원회의 보고서는 이승만과 관련하여 '그는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았지만 부하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그 부하들은 이 박사의 뜻에 맞추어 암살을 강행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편 암살의 직접적 동기가 쿠데타 모의였다는 주장도 있다. 백의사의 염동진은 김구를 추종하는 우익장교들의 내부 동향을 미국 정보기관 CIC에게 제공하고 있었으며 한국군 내부의 정부 반대파와 김구를 연결하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CIC는 김구가 염동진과 함께 군사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고 한다.

123.jpg
▲ 1949년에 준공한 진해 해군부대 안의 대통령 별장.

시조 '목이 그만 멘다'와 헌수송 '송가(頌歌)'

하여튼 두 분의 관계가 이렇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노산 이은상은 김구 선생을 추모하는 시조도 쓰고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축하하기도 했다. 노산은 백범이 돌아가신 지 1년이 지난 1950년 단오절에, 서울 신당동에서 상치쌈을 먹다 불현듯 백범을 그리워하면서 시조 '목이 그만 멘다'를 썼다.

단오날 상치쌈에 쑥갓이랑 실파랑 얼러

한 입 우겨넣다 가신 님 생각한다

그날도 바로 이 상에 마주 앉으셨더니

 

봉창 밑 두들기며 찾아오시던 그 님 생각

가슴에 멍이 든 것 좀체로 안 가셔서

쌈을랑 두 손에 움켜쥐고 목이 그만 멘다

- '목이 그만 멘다' -

구절구절마다 백범을 그리워하는 노산의 진심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1946년 호남신문사 사장 재직 시에 김구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1947년 한독당 전남위원장을 했던 노산으로서는 목이 멨을 것이다. 노산은 1969년, 김구 선생에 대해 쓴 글에서 암살자 안두희를 '34세의 천하의 역적'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김구의 '위대한 생애는 마치 달이 천강(千江)에 그림자를 비추는 것과도 같이 모든 겨레의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있어 계승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강(千江)은 조선 4대 왕 세종이 3년 전에 죽은 소헌왕후를 생각하며 1449년에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며 손수 지은 장편의 노래(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있다. 하나의 달이 천개의 강을 환하게 비치듯이, 김구의 위대한 마음이 온 나라에 빠진 데 없이 골고루 살아 계승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노산은, 이 시조를 쓴 지 6년이 지난 1956년 8월 15일의 이승만 대통령 동상 준공식에 참석하였다. 제80회 탄신경축중앙위원회(위원장 이기붕) 주관으로 서울 남산, 일제시대에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서 동상 준공식이 열린 것이다. 동상의 높이는 81척이었고 대지면적 3000평, 좌대 270평이었다. 8각의 좌대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생애를 조각하였다. 두루마기 차림으로 한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건립비용은 2억 656만 환이었는데 극장연합회가 갹출했다고 한다. 동상 제막식에서 이기붕 국회의장은 "자주독립의 권화이며 반공의 상징인 이 대통령 동상 앞에서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그 뜻을 받들기로 맹세하자"고 말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은상은 불법적인 사사오입개헌을 밀어붙인 이승만 대통령에게 '송가(頌歌)'라는 제목의 헌수송(獻壽頌)을 썼다.

이 겨레를 위하시어 한평생 바치시니

오늘에 백수홍안 늙다 젊다 하오리까

팔순은 짧으오이다 오래도록 삽소서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

일생을 한결같이 몸 바쳐오신

고마우신 이 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길이 길이 빛나오리다

- '송가' -

123.jpg
4·19학생혁명 이후 시민들에 의해 철거되는 서울 남산의 이승만 대통령 동상.

물론 노산만이 시를 쓴 건 아니다. 이승만의 80회 생일축하는 시인 김광섭도 시 '우남 선생의 탄신을 맞이하며'를 썼다.

기상천외의 수법인 사사오입개헌은 1954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집권이 가능하도록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없앤다'는 내용으로 헌법 제3조를 개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재적의원 203명, 재석 의원 202명 가운데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였는데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33명이기 때문에 딱 1표 차이로 부결을 선언하였는데 그다음 날 착오를 일으켰다면서 사사오입, 즉 5 이상은 반올림하고 그 미만은 내린다는 공식을 도입하여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개헌안 통과를 선언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식의 억지 개헌에 의해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선출될 수 있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날짜를 맞추어 동상 준공식 날은 광복절이며 제3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날이었다.

4·19혁명이 일어난 후, 이승만 대통령 동상은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 단군의 동상을 세우자느니, 4·19혁명의 학생들을 기리는 의거기념탑을 세우자느니,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과 대척점(對蹠點)에 섰던 백범 김구 동상이 세워졌다. 이런 사실에 너무 민감할 필요도 없고 확대해석할 필요도 없다. 다만 역사적 아이러니라는 것일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동상 자리가 원래 1949년 김구가 암살된 후 백범 김구 선생 동상봉립추진위원회에서 동상을 건립하려던 자리였다는 사실이다. 경향신문 1949년 8월 18일 자는, 위원회는 건립 장소를 '남산 전 조선신궁 본전 앞 광장으로 정하고 당국과 교섭 중'이라고 보도했다. 그 자리에 김구가 아닌 이승만의 동상이 들어섰다가, 20년 후에 결국은 김구 동상이 세워진 것이다.

김구 동상 건립은 일종의 국가적 사업이었다. 김구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곽상훈)가 서거 20주년을 맞아 동상건립을 추진하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금일봉을 내놓았고, 쌍용그룹 사주이자 공화당의 실력자였던 김성곤은 500만 원을 내놓았다. 각계에서 모금된 성금은 모두 2100만 원에 달했다. 동상 제막식은 1969년 8월 23일에 있었는데, 이 날은 김구의 93회 생일이었다. 좌대와 높이가 각각 6.2m였다. 조각은 조각가 김경승과 민복진이 맡았고, 건립문은 소설가 박종화, 약전(略傳)은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김충현이 썼다. 모두 당대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이었다.

123.jpg
▲ 1969년 8월 23일에 제막식을 한 서울 남산의 김구 선생 동상.

대한민국 정부와 김구의 화해는 5·16쿠데타 직후 김구의 둘째 아들인 김신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이 되고 교통부 장관이 되면서부터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있다. 1971년에 나온 이은상의 <민족의 불기둥>(횃불사)은 박정희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김구를 독립운동의 중심에 올려놓는 활동의 출발점이었다. 그 후 1976년 8월 28일에는 김구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여 정일권 국회의장, 류근창 원호처장, 노산 이은상 등이 참석한 기념식이 시민회관 별관에서 대대적으로 거행되었다. 원호처장은 최규하 국무총리의 치사를 대독하였다. 이제 정부가 나서서 김구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박정희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학계에서도 임시정부와 김구를 독립운동의 중심에 올려놓기 위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이은상이 쓴 <민족의 불기둥>은 그 출발점이었다.2002년 2월 23일(토)과 24일(일)에 국립극장에서는 한국민족음악인협회가 주최하는 '극적 칸타타 백범 김구 -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공연이 있었다. 창작 오페라였다. 작품은 프롤로그, 에필로그와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선 1949년 김구가 암살당한 직후 이은상이 작사하고 김성태가 작곡한 조곡이 나온다. 작가 구히서 선생이 쓴 대본에 작곡가 강준일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가 자신이 다섯 살 때 직접 들은 조곡의 기억을 되살려서 곡을 붙였다. 어릴 때 받은 감격으로 가슴 속에 한 소절 한 소절 새겨 두었던 것이다. 최준호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가 연출을, 정치용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가 지휘를, 조성주 선생이 안무를 맡았었다.

노산이 김구 주석 조가와 이승만 대통령 송가를 모두 지은 것은 두 사람 모두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비록 한독당 활동을 하긴 했지만 시조시인으로서 이승만과 김구의 단독정부 수립 문제로 인한 갈등이 심각한 정치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두 사람의 불화를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백범 조가(弔歌) 1949년, 백범 추모 시조 1950년, 우남 생일 송가 1956년, 백범 동상 약전 1969년, 이 네 가지가 각각 시차(時差)가 있는 일이긴 하지만 3·15부정선거 때까지 우남과 노산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친밀했음을 감안한다면 아무래도 낯 뜨거운 일이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노산은 1960년 3·15, 이승만, 이기붕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문인유세단을 조직하여 전국을 다니며 지지유세를 했다. 마산 3·15의 원인이 된 부정선거과정이었다. 그런데 3년 후, 노산은 서울 우이동에 있는 4·19기념탑 비문도 감동적으로 썼다.

아마 내가 가고파 시인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에 실망이 큰 것 같다. 원로에 대한 기대를 접고 그냥 글을 잘 쓰는 분이라고만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3·15를 불상사라고 한 이은상과 시조 '달'

노산 이은상이 같은 날에 쓴 글 2개를 비교하면서 원로다운 원로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고자 한다. 먼저 설문에 대한 답변이다. 마산사건이 촉발된 근본 원인은 무엇으로 보십니까? 라는 설문에 대하여 '도대체 불합리, 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다'라는 답변과 마산 시민들의 시위가 확대되어가는 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라는 설문에 대하여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다. 앞으로는 더 확대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고로 과오와 과오의 연속으로 필경 이적(利敵)의 결과가 되고 만다'는 답변이 조선일보 1960년 4월 15일 자에 게재되었다. 자유당정권의 불합리, 불합법으로 인하여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인 3·15가 일어났으니 불상사라고 표현했으며 이어서 3·15는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이며 과오이므로 계속해서 확대되면 적을 이롭게 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같은 날짜, 조선일보의 다른 면에는 정부의 치안국장이 마산사건, 공산당 조종 정보를 입수했다고 발표하는 기사가 실려 있고 이승만 대통령이 마산사태에 대해 발표한 담화가 실려 있는데 역시 공산당이 들어와 뒤에서 조종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누명을 씌우려는 위협정책이며 마산시민에게 공산당 운운은 의아하다는 민주당의 반박성명도 실려 있다. 대통령의 담화 직후에 마산사태에 대해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소위 대공3부 합동수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적색분자들의 준동혐의에 대해 과학적으로 수사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123.jpg
▲ 마산사태를 이렇게 본다라는 제목으로 문화각계가 말하는 원인, 수습책에 대한 설문답변을 실은 조선일보 1960년 4월 15일 자.

3·15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노산이 불상사와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라고 표현한 3·15에 대해 시인 이광석은 3·15 첫 돌에 부치는 글 '아직도 우리는 고독하다' 에서 '꽃처럼 피어나던 젊은 목숨을 / 나라 위해 겨레 위해 피를 흘린 이 날'이라고 불렀다. 시조시인 김복근은 '마산의 봄4'에서 '돌이켜 생각하면 / 그 때 그 날은 / 진실을 캐어내는 의미의 날이었다'고 하였다. 그 외에도 마산지역의 시인들이 쓴 3·15에 관한 모든 시에서 불상사,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 무모한 흥분, 과오 등의 표현 혹은 그 비슷한 뜻으로 3·15를 지칭하는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3·15는 불상사도 아니었고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성을 잃은 만행은 독재정권이 저질렀고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은 사전 부정선거운동이었다.

이러한 내용의 설문 답변이 조선일보에 실린 4월 15일, 같은 날에 노산은 시조 '달'을 썼다.

혼란한 불빛이

시민의 눈을 어지럽혔다

달은 무참히도

성 밖으로 쫓겨났다

달 찾아

지금 이 밤에

나도 거리를 벗어났다

 

진실이란 언제나

이같이도 외로운 건가

그러나 흐렸던 혼이

달빛 마냥 환하잖으냐

말없이

밤이 이슥토록

달만 바라고 섰었다

- '달' -

이 시조는 김연준이 작곡하여 <김연준 가곡 2집>에 수록되어 있다. 문학 작품은 많든 적든 그 사회가 지닌 특수한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시조 '달'에서 '시민의 눈을 어지럽힌 혼란한 불빛'이 3·15를 촉발시킨 불합리, 불합법의 자유당 정부라면 '무참히 성 밖으로 쫓겨난 달'은 누구일까? 이승만, 이기붕 정권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꿈이었을까? 이승만 대통령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대통령 하야는 이 시조를 쓴 지 11일 후인 4월 26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미 민심이 돌아섰다라고 노산이 판단하고 있었다면 조만간 달이 쫓겨나리라고 예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타깝게도 밤 중에 달을 찾아 거리를 벗어났고, 말없이 밤이 이슥토록 달만 바라고 서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었고 자신이 이순신 장군 같은 분이라고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신세가 안타까웠을 것이다. 노산에게 나라와 이승만은 둘이 아니고 하나였었다. 결국 달은 조국이다. 왜냐하면 그의 조국사랑은 이승만 대통령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2년 전인 1958년 8월에 쓴 조국에 바치는 노래인 '당신과 나' 에서도 달이 하늘에 있다. 이 작품에서는 당신이 조국이다.

자정이 넘었습니다.

어쩌면 이리도 고요할까요

수정 같은 하늘에

달도 졸고 있습니다.

이 밤도

나는 엎디어

당신의 이름을 외웁니다.

 

당신은 내 면류관이요

내 기도요, 내 노래입니다.

그리워 바라보다

다시 보면 내 자신입니다.

이 순간

당신과 나는

분명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 '당신과 나' -

123.jpg
▲ 이승만과 김구.

이토록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자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노산은 2년 후에 3·15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이기붕 후보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 위해 전국을 다녔다.

만약 3·15를 불상사, 무모한 흥분이라고 말한 분이 우리 사회의 원로도 아니고 가고파의 시인도 아니라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노산이 시조 '달'을 쓴지, 불과 4일 전인 4월 11일 오전 11시쯤,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입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신포동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떠올랐다. 시민의 분노가 다시 들끓기 시작했고 오후 6시 15분쯤, 2차 마산의거가 일어났다. 1차 때보다 더 많은 인원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였으며 오후 9시 30분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자와 부상자가 또 속출하였다. 마산지역 노동운동의 선구자인 소담 노현섭의 4월 11일 자 육필일기에 의하면 '3·15선거 당시 피살당했다는 김주열 군의 시체가 무참히도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인양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흥분된 말들이 들려왔다. 하오 7시경부터 드디어 시민과 학생들이 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 총소리는 야음(夜陰)을 깨뜨리고 있었다'고 한다. 노산이 총격으로 인한 사망과 부상을 안타깝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3·15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 아니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확대되어 적을 이롭게 하기는커녕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한밤중에 달을 찾으러 나선 노산이 엉뚱하게도 3년 후 무참히도 달을 쫓아낸 '민주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는 4·19학생혁명기념탑의 너무나 감동적인 비문을 썼다는 걸 알고서 나는 또 한 번 실망하였다.

<참고문헌>

-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2015년), 125~126쪽

- 임영태, <두 개의 한국현대사>, 생각의 길(2014년), 113쪽

- 이은상, <가고파>, 도서출판 경남(2012년), 경남시조시인협회, 167쪽

- 이은상, <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 횃불사(1969년), 561쪽

- <희망> 1955년 4월호, (<창원의 숨결>, 창원문화원(2015년 제3호), 135쪽)

- 서울신문 1955년 3월 26일 자

-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이야기, 김형민, 시사인 2016년 10월 15일 자

- 역사쌤이 들려주는 한국사 이야기, 네이버 블로그 역사 EDU, http://blog.naver.com/numbersam/220432808896

- 백범이 쓴 <나의 소원>

- 3·15의거 기념사업회, <너는 보았는가 뿌린 핏방울을>, 도서출판 불휘(2001년), 199쪽

- <너는 보았는가 뿌린 핏방울을>, 도서출판 불휘(2001년), 308쪽

- <노산문학선>, 탐구당, 53쪽

- 노산 이은상 시조선집 <가고파>, 경남시조시인협회, 도서출판 경남, 48쪽

- 김복근, <노산시조론>, 도서출판 경남(2008년), 12쪽

- <가고파>, 도서출판 경남(2012년), 경남시조시인협회, 145쪽

- 이상용 옮김, <민족이여 겨레여>, 이상용 옮김, 미르인쇄(2014년), 노현섭기념사업회, 98쪽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