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는 어디 있습니까?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것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바람으로 느낄 수 있다. 거리를 걸을 때 저 멀리서 불어와 내 피부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서 봄기운을 느낀다. 비록 기온이 높다 하더라도 겨울바람에는 비수 같은 날카로움이 숨어있다. 냉기가 살갗을 파고든다. 하지만 봄바람에는 그런 날카로움이 없다. 차갑지 않고 부드럽다.

그 봄바람을 느꼈을 때 문득 지리산에 가고팠다. 바쁜 일상이지만 하루쯤은 지리산 골짜기에서 봄바람을 맞아보고 싶고 햇볕도 쬐고 싶었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연락해서 휴일 지리산을 다녀왔다. 그 넓은 지리산 자락은 어느 구석, 어느 골짜기를 가도 좋지만 이번에는 오랜만에 벽송사를 다녀왔다. 벽송사는 햇볕이 잘 드는 곳이다. 간 김에 조금 더 들어가서 뱀사골 쪽도 살짝 들여다보고 왔다.

 

소나무

내게 벽송사의 이미지는 나무로 기억된다.

벽송은 푸른 소나무라는 뜻이다. 벽송은 이 절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 절을 크게 일으킨 지엄선사의 호이기도 하다. 절 위로는 잡목이 끼어있지 않은 소나무숲이 자리 잡고 있다. 절 아래에서 보면 절은 소나무숲에 둘러싸여 있다.

벽송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소나무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나무가 '도인송'과 '미인송'이다.

도인송은 누가 보더라도 훤칠하게 잘 생긴 소나무다. 그 기상이 늠름해서 멀리서도 잘 보인다. 그리고 도인송 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가늘고 야윈 모습의 미인송이 도인송을 바라보고 있다. 미인송은 마치 도인송에게 다가가려는 듯 45도로 비스듬히 기운 채 도인송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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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앞 전나무 아래 너럭바위에 앉으면 벽송사와 그 주변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여름에 이 곳에 앉으면 시원한 바람과 그늘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조재영 기자

 

조금 멀리서 보면 도인송이 미인송에 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 알 수 있다.

도인송은 마치 깨우침을 얻고자 꼿꼿한 자세로 좌선을 하며 용맹정진하는 스님을 닮았고, 미인송은 그런 스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여인을 닮았다. 미인송을 멀리서 보면 쪽머리를 한 여인의 옆모습처럼 생겼다.

도인송 아래 함양군에서 설치한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에는 도인송, 보호수, 소나무, 고유번호 12-11-2, 수령 300년, 지정 일자 2011년, 수고 35m, 소재지 마천면 추성리 산18-19, 나무 둘레 1.2m, 관리자 벽송사 주지 등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미인송에는 별다른 표시가 없다.

인터넷으로 '벽송사'를 검색해보면 벽송사의 옛날 사진이 많이 있는데, 이들 사진을 살펴보면 미인송이 지금처럼 기울어져 있지 않고 거의 수직으로 서있다. 이는 미인송이 지금처럼 기울어진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은 더 이상 넘어지지 않게 철제 지지대로 아래 쪽을 받쳐 놓아서 더 기울어지지는 않겠지만 다시 예전처럼 똑바로 서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마도 100년쯤 세월이 더 지난 뒤에는 "미인송이 도인송에게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고 싶어 기울어졌다"라는 스토리텔링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참선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점심 시간을 약간 지난 시각이었다. 참선 수행 중인 스님들의 동안거가 끝나지 않았는지 공부방 주위로 '접근 금지'와 '조용히 할 것'을 알리는 줄이 처져 있다. 우리는 천천히 경내를 둘러봤다. 동행한 이들이 조용하게 절을 둘러보는 사이 나는 도인송에게 다가갔다.

나는 도인송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디에 가면 소를 찾을 수 있을까요?" 도인송이 대답했다. "소는 너희 집에도 있고, 니가 일하는 곳에도 있고, 지금 니 마음속에도 있는데 왜 엉뚱한데 와서 소를 찾느냐? 바람이나 쐬고 가거라." 불교에서 '소'는 '자신의 본성'을 상징한다. '도'를 구하는 스님들은 참선하며 그 '소'를 찾는다. 자신의 본모습을 찾는 것이 곧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그 본성을 찾으려고 어떤 스님은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앉아서 참선을 하고 어떤 스님은 크게 깨달음을 얻지 않으면 결코 눕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장좌불와' 했다고 한다. 그분들은 정말 치열하게 구도했을 테다. 한평생을 말이다. 그렇게 한평생을 치열하게 자신과 싸워도 깨달음 한 조각도 얻기 어려운데 어찌 책 몇 권, 생각 몇 마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아무런 노력 없이 뭔가를 얻거나 이루겠다는 생각 그 자체가 탐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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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송사 원통전 뒤에 있는 도인송(오른쪽)과 미인송(왼쪽). 미인송은 멀리서 보면 쪽머리를 한 여인의 옆모습을 닮았다. / 조재영 기자

 

벽송사는 한국 불교에서 참선으로 도를 깨우치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벽송사 안에 있는 안내판 제목도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 벽송사'라고 적혀있다. 안내판에 적힌 벽송사에 대한 설명은 대략 이렇다.

벽송사는 조선 중종 시대인 1520년 벽송 지엄선사가 창건했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이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에서 보면 벽계 정심, 벽송 지엄, 부용 영관, 경성 일선, 청허 휴정(서산), 부휴 선수, 송운 유정(사명), 청매 인오, 환성 지안, 호암 채정, 회암 정혜, 경암 응윤, 서룡 상민 등 정통 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 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뤘다.

1704년(숙종 30년) 환성 지안 대사가 벽송사를 중수했는데 이때 불당, 법당, 선당, 강당, 요사채 등 건물이 30여 동이나 있었고 상주하는 스님이 300명이나 됐다. 하지만 이런 벽송사도 일제 때 조선 불교 말살 정책을 비켜 가지 못했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다 국군에 의해 모두 불타고 말았다. 벽송사가 재건된 것은 1960년대 이후다.

과거 사진을 보면 지금 계단식으로 석축을 쌓아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절 마당은 모두 논밭이었고 절 뒤쪽은 대나무밭이었다. 대나무는 지금도 예전의 흔적처럼 일부가 남아있다.

다른 절에는 대웅전에 부처를 모셔놓았는데 이 절에서는 원통전이 대웅전 노릇을 한다. 원통전에 가서 부처 앞 불전함에 만 원짜리 한 장을 넣고 세 번 절했다. 가족과 부모님의 건강을 빌었다. 음력 설 지나고 처음 절을 찾아간 것이니 그리하고 싶었다. 원통전 문을 열고 나설 때, 이것마저도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들어가서 불전함에서 만 원을 꺼내고 부처에게 아까 빌었던 것을 취소한다고 선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그냥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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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송사 담장안에서 본 바깥 세상, 그곳에 모터사이클이 있다. / 조재영 기자

 

삼층석탑과 장승

절 맨 위쪽 미인송 옆에 삼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경주 불국사에 있는 석가탑을 축소해놓은 듯하다. 보물 제47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외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벽송사는 창건 연대가 정확히 기록된 것이 없다. 그래서 이 삼층석탑으로 미뤄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탑의 위치로 보면 그 맞은편 마당 공터에 다른 석탑이나 조형물 혹은 나무가 한 그루쯤 있어야 균형이 맞는데 아무것도 없어 어쩐지 허전하다. 어쩌면 그곳에 무엇인가 있었는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없어졌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벽송사에는 삼층석탑 말고도 문화재급 유물이 하나 더 있다. 나무로 깎아 세운 장승이다. 목장승은 2개인데 하나는 금호장군, 하나는 호법대장군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들 목장승은 전남 순천 선암사 앞에 있었던 목장승과 쌍벽을 이룰 만큼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쉽게도 도인송과 미인송에 빠져 목장승을 보지 못하고 왔다.

벽송사에는 도인송, 미인송과 같은 소나무 말고도 이 절을 찾아온 사람들을 따듯하게 품어주는 나무가 또 있다. 절 출입문 건너편에 서 있는 나무다. 키가 아주 큰 전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있다. 전나무 아래에는 바닥이 평평하고 너른 바위가 자리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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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송사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삼층석탑이 있다. 아마도 옛날에는 이 석탑 주변에 대웅전이 있었을 것이다. / 조재영 기자

 

절 앞에 도착하면 잠시 이 바위에 앉아 땀을 식히거나 숨을 고르면서 절 전체를 살펴보기에 안성맞춤인 자리다. 전나무 두 그루는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올라가 있어서 멀리서도 잘 보인다. 절 높은 곳에서 건너편 계곡 쪽을 바라볼 때도 도드라져 보인다.

서암

절 아래 쪽 인근에 벽송사 주지인 원응스님이 조성했다는 암자 '서암'이 있다. 함양군 홈페이지에는 서암을 "벽송사에 따른 암자이다. 벽송사 주차장 위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100m 정도 가면 서암이 나타난다. 현재의 벽송사의 원응 주지스님이 1989년 이곳으로 옮겨온 뒤 화엄경 금자사경을 완성하고 주위의 자연석 암반 위에 대방광문(大方廣門 :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 극락전(極樂殿 : 아미타여래가 주불이 되어 무수한 불보살이 조각된 부처님의 이상 세계 모습), 광명운대(光明雲臺 : 구름일듯이 무수한 불보살이 상주하는곳), 사자굴(스님들의 수행장소)등을 조각하고 만들어 그 화려함과 정교함, 웅장함이 과히 장관을 이루고 있다.

서암의 절경은 오밀조밀한 기암괴석에 온갖 기화요초로 정원을 만들어 생전에 볼 수 있는 극락세계로 요즘 들어 부쩍 탐방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철판으로 길을 만들어 연결해서 다니고 있고 바위굴을 만들어 스님들이 수도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곳이다. 입구의 마애상은 바위에 나한을 양각해 놓은 것으로 이곳에 들어서면 저절로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이 생기는 불교 예술의 극치이며 연중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서암에 들르지 않았다. 내가 서암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에 벽송사에 왔을 때 한 번 서암에도 들렀는데 그 이후로 서암에는 들르지 않는다. 멀쩡한 바위에다 무수하게 많은 조각을 해놓은 모양이 너무나도 볼썽사나워서다. 그 조각이 부처이든 나한상이든 뭐든 그것을 보는 것이 불편했다. 예전에 방문했을 때는 바위를 뚫어서 동굴법당을 만들어놓고 입장료도 받고 있었다. 스님들에겐 그런 것들이 성스러운 '불사'일지 모르지만 자연에겐 그냥 '파괴'일 뿐이다. 자연은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것이 불교의 교리에서 맞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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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송사 위쪽에서 건너편 칠선계곡 쪽을 바라본 전경. 두 그루 키 큰 전나무가 절 앞을 지키고 있고 그 아래 앉아 쉬기 좋은 너럭바위가 있다. / 조재영 기자

 

지리산전적기념비

벽송사에서 나와 마천을 지나면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이다. 실상사 앞, 산내면 소재지를 지나 산중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뱀사골 입구에 반선매표소가 있고 그 옆에 지리산탐방안내소가 있다. 탐방안내소에는 빨치산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소멸했는지 알 수 있게 설명해주는 전시관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남원시가 세운 지리산전적기념비가 있다.

전시관 2층에 빨치산 토벌대 전투경찰 제18대대장 차일혁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5천 년 이어져 온 우리 민족사라는 거시적인 안목으로 볼 때 지리산 토벌대와 빨치산의 대결의 역사는 극히 짤막한 순간에 불과한 것이다. 이 짧은 기간에 부상된 두 개의 조국! 그 조국을 위해 뜨거운 피를 흘렸던 이 땅의 젊은이들! 그들에게 조국은 둘인가? 하나인가?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빨치산을 토벌했던 토벌대, 토벌대에 희생된 빨치산도 같은 역사의 피해자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을까? 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과연 몇 사람이 이를 알겠는가? 지리산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군경과 빨치산들에게 물어보라! 너희들은 왜 죽었느냐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혹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죽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자 몇이나 있겠는가?"

▲ 뱀사골 입구 지리산탐방안내센터 옆에 자리잡은 지리산전적기념비 조형물. / 조재영 기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때로 사람들은 신념(사상)을 지키고자 목숨을 걸기도 하지만 자기 신념을 지키고자 남을 희생시키기도 하고, 신념을 빙자해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 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 봤던 영화 '강철비'의 명대사가 생각난다. "분단국가 국민들은 분단 그 자체보다 분단을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더 고통받는다."

돌아보면, 차일혁의 말처럼 빨치산도 토벌대도 역사의 희생자가 아니었을까. 혹은 사상을 내세워 권력을 움켜쥐려 했던 이들에게 철저하게 이용된 희생자들이 아닐까. 내가 보기엔 2018년 지금도 '분단 그 자체보다 분단을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자(집단)'들이 수없이 많다.

지리산에서 봄바람을 쐬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볍게 떠났던 여행이었지만 귀갓길 머릿속은 많은 생각으로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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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관 2층에 전시돼 있는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과 토별대 이야기. / 조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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