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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보기] (6) 마산의 목욕탕

100년의 역사, 식민지 위생시설에서 생활공간으로

최환석 기자 che@idomin.com 입력 : 2018-04-04 11:58:54 수     노출 : 2018-04-04 12:04:00 수

1만 원짜리 지폐를 내고 거스름돈을 받는다. 옷을 모조리 벗고 수증기 가득한 공간으로 들어선다. 따뜻한 탕 안에 몸을 맡기자 피로는 사라지고 마음은 평온을 되찾는다. 몸과 마음이 열리니 문득 목욕탕의 역사가 궁금해진다.

공간을 마산지역으로 좁혀보자. 마산 공중목욕탕의 역사는 얼마나 됐을까. 무려 100년이 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목욕이라는 생활양식은 존재했지만.

조선 시대 목욕은 주로 질병 치료라는 공공의료의 성격을 띄었다. 서양 문물 영향을 받아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근대 사회로 이행하던 시기에는 서양 위생문명론 시각에서 전염병 예방과 위생 목욕이라는 화두가 대한제국 주요 문제로 등장했다.

1883년 무렵에는 부산에 동래온천이 생겼다. 부산거류민역소에서 개발을 담당했다. 온천과 여관을 겸업했고, 목욕업이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한반도로 넘어온 일본인들은 목욕업에 손을 댔다. 1901년 신문 광고를 보면 '목욕탕 청결 수리', '한증막 설치', '본국의 명주와 안주 첨비'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마산지역 목욕탕의 시발점은 '식민지 위생 제도'에서 비롯한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은 '게으르고 더러운' 존재로 치부됐다. 목욕탕은 곧 일제의 문명화 전략 하나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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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 마산합포구 두월동 3가에 자리한 앵화탕. 마산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이다. / 최환석 기자

1912년 조선 총독부는 목욕업과 관련한 규칙을 만들었다. 당시 목욕탕은 현지 경찰 담당이었고, 규정은 세밀했다. 주인의 신원, 영업장소, 공간 크기와 오수 배설 선에 관한 내용, 용수장과 위치, 평면도, 건물 도면과 구조, 최근에 생긴 다른 목욕탕과의 거리, 연료의 종류 등을 등록 필수 사항으로 규정했다.

목욕탕 건물의 위치·구조, 지켜야 할 사항, 혼욕 금지 등이 담긴 22개조 부칙 등을 포함해 이는 현재 목욕업 법령 원형이 된다.

1904~1905년 러일전쟁 직후 많은 일본인이 옛 마산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5000여 명의 일본인은 신마산 일대에 대부분 거주했다. 교원이나 공무원을 비롯해 주정, 토목 등을 다루는 직업군까지 다양했다.

이 가운데 탕욕업자는 1910년 기준 8명이 존재했다. 1915년 <마산안내>라는 책자를 보면, 당시 마산에는 목욕탕 6개가 있었다. △양로 △신탕 △욱탕 △대공온천 △송내 △명문 등이다. 위치로는 신마산 지역 2곳, 마산 중앙지역 2곳, 원 마산 2곳이었다.

옛 마산 두월동 3가에 있었다고 기록된 신탕은 아마도 앵탕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파악된다. 앵탕은 이후 앵화탕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지금도 운영되는 마산 목욕탕의 산 역사다.

지난 2008년 경남도에서 경남의 최초, 최고(最古), 최다, 최대 기록을 한데 묶어 <경남새마루>라는 책자를 냈다. 책은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을 '마산 중앙탕(오동동)'이라고 소개하지만, 실제 앵화탕이 더 오래됐다는 사실.

앵화탕의 전신인 앵탕은 1914년 첫 등기가 확인된다. 당시 두월동은 신마산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동네였다. 첫 주인은 일본 효고현 출신 가지하라 겐지로다. 1928년 마코토 요우라는 사람이 인수했는데, 마코토는 1925년 설립한 (주)마산무진 이사 중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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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 마산합포구 두월동 3가에 자리한 앵화탕. 마산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이다. /최환석 기자

당시 앵화탕은 1층에 남탕과 여탕을 뒀다. 목욕탕 앞 우물과 무학산 관음사 주변에서 물을 끌어다 썼다. 이후 1945년 해방 직전 한국인 설천섭 씨 등이 목욕탕을 사들였고, 1983년 소유권 이전, 1985년 개축 등의 과정을 거쳤다.

일제강점기 목욕탕에서도 차별은 존재했다. 입욕 시간에 차이를 둔다거나, 일본인 목욕탕에는 조선인이 입욕할 수 없도록 막는 것. 3·1운동 이후 차별 철폐 목소리가 제기됐다.

1960년대 중반 마산은 도시화·산업화 바람을 타면서 인구가 늘었고 그만큼 목욕탕 수요도 늘었다. 인구는 1961년 15만여 명에서 1976년 33만 8000여 명으로 늘었는데, 1959년 13개, 1963년 16개였던 목욕탕도 1974년 36개로 크게 늘었다.

1970년대의 또 다른 특징은 동마산지역에 목욕탕이 늘었고, 가까운 창원지역에도 목욕탕이 새로 생기거나 늘었다는 점이다. 당시 창원에는 낙면탕, 보수탕, 창원탕이 새로 생겼다. 이때가 마산지역 목욕탕 역사의 부흥기였던 셈이다. 목욕탕은 동네 구석 깊숙이 자리했다.

식민지 위생 제도에서 비롯한 목욕탕은 이후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1986년 관련 법령 개정 이후 다양한 형식의 목욕탕이 생겨났다. 큰 규모의 목욕탕이 생겼고, 굴뚝 관련 조항이 사라졌다. 1999년 한 차례 더 법령을 개정하면서 목욕탕업은 자유업종으로 바뀌었고, 24시간 영업을 할 수 있게 됐다.

1980년대 마산지역 목욕탕은 56곳으로 늘었다. 1963년에 비해 360% 늘어난 셈이다. 이때 마산의 목욕탕은 전성기를 찍고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2000년대 들어서 동네 목욕탕이 하나둘 문을 닫았다. 하지만, 방식이나 공간이 변화를 치렀을 뿐, 여전히 목욕은 중요한 일상의 하나다.

※ 기사는 지난 2월 27일 창원YMCA에서 열린 인문 강좌 '마산목욕탕 100년사'에서 유장근 경남대 명예교수가 설명한 내용을 정리, 보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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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환석 기자
  • 문화부. 공연, 문화정책 담당. 레져도 함께. 제보/피드백 010-8994-4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