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독일마을 스트라우스 김 루드빅 씨가 92세의 생을 마치고 지난달 27일 독일마을 추모공원에 안장되었다. 파견 간호사인 아내를 따라 한국으로 왔지만 말도 글도 통하지 않고 독일과 비교해서 상식이 통하지 않는 한국에서의 생활이 힘들었으리라싶다.

그의 부음을 듣고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들이 많이 살았다는 독일 베스트팔렌지역에 고교 2학년 때 교환학생으로 갔던 딸과의 인연으로 가끔씩 그의 집에 들러 루드빅 씨 부부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대문에 붙어있는 마인즈가 자기 고향인데 그 곳에서 은행장을 했다는 얘기며, 한국인으로 귀화해서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하였던 이참(이한우) 씨가 같은 고향사람이라서 가끔씩 만나기도 한다는 얘기도 들었던 것 같다. 지금 독일마을에는 자기와 같은 독일인 남자는 세 명뿐이라고 했다.

처음 남해군과 계약할 때 독일마을로 들어와 살 사람은 집의 층수를 제한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여기저기 높은 건물이 들어서고, 관광객들이 아무 곳에 주차를 하거나 사생활을 무시한 채 주인의 허락도 없이 남의 집을 불쑥 들어와 사생활을 침해해 독일로 돌아간 사람도 있다는 얘기도 했다.

루드빅 씨는 수영을 좋아했는데 남해에는 그럴 장소가 없었는지 같은 마을의 독일인 할아버지와 함께 사천에 있는 남일대 해수욕장 근처 사우나에 가거나 하동 옥종에 있는 실내수영장에 갈 때 따라간 적이 있는데 시민들을 위한 시설이 편리하게 잘 되어있는 독일에서 살았더라면 나이 들어 이런 불편함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내비게이션이 없는 차를 보기가 쉽지 않은 한국에서 그의 차에는 내비게이션이 없었는데 차를 타고가다 "육영, 육영, 칠영, 칠영"하길래 무슨 뜻이냐고 운전을 하는 그의 아내에게 물으니 무인단속카메라의 위치를 기억해서 그런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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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독일에 파견되었던 광부나 간호사들은 우리 근대사의 주요한 한 부분이며 한국의 경제발전에 많은 보탬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끼친 영향이 적지 않은데 나이 들어 고향이 그리워 돌아온 자들과 가족이 된 루드빅 같은 분들이 더 이상 불편해 하지 않게 배려해 주기를 바란다. 루드빅 씨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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