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누군가에게 말하고팠던 감정들
부족한 글 읽어준 데 감사…행복하시길

문방구에서 한 아이가 주인아줌마와 놀고 있다. 보기에는 그래 보이는데 아이는 심심한 걸 견딜 수가 없어서 미움을 견딘다. 자기는 학원에 다니지 않아서 3시간 동안 갈 데가 없다고 한다. 맞벌이를 하는 아이 엄마는 집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생이란 게 모든 가능성을 가지지만 딱 하나 안 되는 게 가만히 있는 거다. 살아가는 생에 가만히 있으라는 말처럼 어려운 게 없다. 귀찮아서 안 살 거면 집에 가라는 아줌마의 말을 놀이로, 대화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미움을 견디는 게 심심한 것보다는 나은 모양이다.

세 시간의 시간이 남는다고 할 수 있다. 나 같은 어른의 눈에 세 시간이면 뭔가를 할 수 있을만한 시간인데. 꾸준히 하루에 세 시간씩 공부를 한다면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제법 공부를 잘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 시간을 견딘다. 열심히 일하면 우리는 모두 부자가 되겠지만 우리가 모두 부자가 되지 못했듯이 아이의 세 시간은 버려지는 시간만도 못한 견뎌야 할 시간이 된 셈이다. 아이는 엄마에게 말하듯이 갈 데가 없다고 대든다. 문방구 아줌마는 내 알 바 아니라고 말한다.

네가 심심한 건 내 알 바 아니니 나가서 놀라고 말한다.

살면서 순간순간 보고 느낀 것들이 가슴에 가득 차올라오곤 했었다. 어딘가, 누구에겐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눈물들이 있었다. 심심해하는 아이를 키우려고 아이 엄마가 어딘가에서 견뎌야 할 시간 같은 것들 말이다.

내가 그렇게 살아와서인지 아이에게 용돈도 주지 못하고 학원도 보내주지 못하면서 견디는 못난 시간 속에서 만난 사람들. 미움인지 욕인지 알면서 아이들을 위해 견디지만 정작 아이에게 견뎌야 할 생활을 물려주는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에 관한 이야기들.

글을 쓰다 보면 언어로 저장된 것들이 아니라 느낌들, 눈물이 날 것 같은 감정들로 저장된 것들이 나도 모르게 글을 이끌고는 했었다. 그 감정들을 따라가면서 글을 써왔었는데 이제는 내 마음이 문방구에서 심심해하는 아이처럼 심심해져 버렸다.

나에게 글은 단어도, 문장도 아니었다. 나에게 글은 누군가의 눈물이었고, 누군가 내가 상처받았을 때 내민 손 같은 것이어서 흔하게 알지만 내 상황이 흔하지 않아서 흔한 것들이 내 가슴을 파고들 때가 글이 됐었다.

좀 더 일찍 그만 썼어야 했는데라는 생각과 인제 그만 쓰려니 서운한 생각이 같이 든다. 글쓰기를 따로 배운 건 없지만 나에게도 글을 쓸 때의 원칙 같은 생각이 하나 있다.

어떻게든 근사한 글을 써서 사람들 마음에 가 닿도록 하자고 말이다. 근사하게 글을 쓰는 것도 좋지만 그 근사한 글이 나와 너무 다르지 않기를 내가 바란다는 것이다.

마음에 힘이 있어야 글이 되고, 내 마음이 간절해야 뻔한 이야기, 흔한 이야기라도 읽는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데 마음이 심심해져 버렸다.

내 글이 읽는 사람의 미움을 견디는 심심함이 되도록 한다는 건 너무 아픈 일이어서 말입니다. 사람이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존재하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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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할 수 있는 시간이란 값진 것을 가지고 가끔은 아깝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준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과자장수 박명균 드림.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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