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23년 만에 '귀향'
음악제 앞서 추모행사도
보훔심포니오케스트라
'광주여 영원히' 개막공연
정경화, 바이올린 협연

상처 입은 용이 고향에 묻혔다. 사후 23년 만의 일이다.

작곡가 윤이상(1917~1995) 유해는 지난 2월 독일 베를린 가토우 공원묘지에서 핀란드 헬싱키, 일본 도쿄를 거쳐 고향인 통영으로 옮겨졌다.

이장은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유족의 이장 제안에 통영국제음악재단과 통영시가 움직였다. 청와대와 베를린시를 설득한 끝에 성사됐다.

올해 통영의 봄 풍경은 예년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윤이상 귀향이 없었다면 말이다. 그의 귀향으로 모든 관심은 통영으로 쏠렸다.

유해는 지난달 20일 통영국제음악당 뒤에 묻혔다. 올해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일인 지난달 30일 즈음이 안장 예정 일자였지만 앞당겨 비공개 안장을 진행했다. 파도 넘실대는 바다가 보이고 비릿한 바다 내음이 전해오는 공간은 간략하고 조촐했다. 음악당을 찾은 이들은 98㎡ 묘역에 놓은 너럭바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난달 30일 오후 통영국제음악당에서 2018 통영국제음악제 개막 공연이 열렸다. 사진은 보훔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모습. /통영국제음악재단

바위에는 가장 먼저 연꽃을 이르는 '처염상정(處染常淨)' 네 글자를 흘려 새겼다. 아래로 '윤이상' 'ISANG YUN' '1917~1995' 문구를 차례로 남겼다. 바위 곁으로 향나무와 해송이 놓였다. 유해는 너럭바위 아래 자연장으로 안치됐다.

유족은 조용한 안장을 바랐다. 평소의 뜻이었다. 윤이상 유해 안장을 반대하는 단체 항의도 비공개 안장을 결정한 까닭이었다.

보수단체를 표방한 '박근혜 무죄 석방 천만인 서명운동 경남본부'는 윤이상 유해 이장 결정 이후 지속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윤이상 이념적 성향을 문제 삼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도 주된 요구였다.

윤이상은 1967년 중앙정보부가 조작·과장한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바 있다. 그가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베를린에 묻힐 수밖에 없었던 까닭 하나다.

개막 공연서 연주 중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통영국제음악재단

올해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일이었던 지난달 30일 분위기는 과열되는 듯했다. 이날 오후 묘역에서 추모식이 열렸다. 행사 전 안장 반대 단체는 음악당 본관 앞에서 묘역 철거를 주장했다. 자리를 옮긴 이들은 방송차량을 타고 통영 중앙동 강구안을 배회했다. 차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윤이상 빨갱이'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 구절이 반복해서 나왔다.

그러나 분위기는 이들 뜻과는 반대로 흘렀다. 통영 곳곳에는 윤이상 유해 안장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이날 저녁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 로비도 인산인해를 이뤘다. 오후 7시 30분 열리는 2018 통영국제음악제 개막 공연을 기다리는 발걸음이었다. 윤이상 아내 이수자 여사와 딸 윤정 씨도 공연장을 찾았다.

이날 공연은 보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무대였다. 빈자리를 찾기 어려운 공연장 안에 불이 꺼지고 무대에 보훔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올랐다.

음악제의 시작은 윤이상이었다. 그가 1981년 발표한 '광주여 영원히(Exemplum in Memoriam Kwangju)'가 서막을 장식했다.

윤이상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보편적인 모범"으로 정의했다. 그는 자신 작품이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비'이자 '세상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대한 촉구'가 되기를 바랐다.

통영국제음악당 뒤편에 조성된 작곡가 윤이상 묘역. /통영국제음악재단

비극을 극대화하지 않고 추상적인 관현악으로 표현한 곡이기에 오케스트라 또한 넘치지 않고 끝까지 담담함을 유지했다.

이어진 스트라빈스키 '불새 모음곡' 연주를 지나 휴식 시간을 거쳐 다시 무대에 불이 켜졌다. 검은색 옷을 입은 오케스트라 단원 사이로 대비되는 흰옷을 입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등장했다. 관객은 고희(70세)에 이른 불세출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를 아낌없이 반겼다. 정경화와 오케스트라는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 77'을 연주했다.

1악장에서 정경화는 극적이면서 역동적인 연주를 소화했다. 격렬한 음형을 다루는 상황에서도 관록을 보였다. 각각의 오케스트라 파트에 몸을 기울이며 줄곧 배려했다. 1악장이 끝나자 객석에서 박수가 나왔다. 악장 사이 보통 손뼉을 치지 않는데 흥분을 참을 수 없었던 관객이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지난달 30일 추모식에 참석한 이수자(오른쪽 둘째) 여사. /통영국제음악재단

세 도막 형식(세 부분으로 구성한 악곡 형식) 2악장과 론도 형식(순환부를 취하는 악곡 형식) 3악장이 빠르게 이어졌다. 곡 끝에 이르러 정경화와 오케스트라는 신나게 내달렸다.

모든 연주가 끝나자 관객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환호가 이어졌다. 정경화는 퇴장과 입장을 반복하며 관객에게 인사를 전했다.

갈채가 계속 이어지자 정경화가 입을 열었다. 자신에게 모든 조명이 쏠리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 모습이었다. 그는 바흐 '무반주 소나타 No.2 A단조 BWV 1003'을 선보이겠다고 설명했다. 윤이상의 귀향을 위로하는 곡이라는 말과 함께.

정경화는 지난해 미국 카네기홀에서 치른 50주년 기념 연주회에서 연주한 곡으로 상처 입은 용을 보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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