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함께 기억하자] (상) 학살의 흔적
당시 9살 할머니 증언 생생, 군인 '몽둥이'에 동생 잃어
2살에 아버지 희생당한 유족, 말 못한 '통한의 세월'보내

제주는 오래전 '죽음의 섬'이었다. 오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배운 잔악한 학살의 흔적이 4·3 당시 군대와 경찰에 의해 그대로 재현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오랜 세월을 소리죽여 살았지만, 단 한번도 잊은 적 없는 기억을 토해내고 있다. 4·3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를 거쳐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올해는 제주4·3 70주년이다. 이에 발맞춰 제주도는 2018년을 '제주방문의 해'로 정하고 희생자 넋을 기리고 있다.

◇증언자, 4·3은 민간인 피로 물들어 = 고완순(79) 씨는 지금도 4·3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9살이던 소녀는 그날 지옥문에서 살아 돌아왔다. 1949년 1월 17일 제주시 조천읍 북촌마을에서 약 400명의 주민이 학살당한다.

고완순 씨

"어망(엄마) 나 손에 피 묻었어. 어망. 어망. 무서워서 울면서 벌벌 떨었어요.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엎드려 박박 기었어요. 어망 손을 잡고 엎드려 있는데, 어망 등에 업혀 있던 남동생이 우니까 군인이 몽둥이로 동생 머리를 내리쳤어요."

고 씨의 남동생은 머리에 물이 찼다. 치료도 제때 받지 못한 채 결국 1952년 8월에 죽었다. 고 씨는 학교 돌담에 턱하니 있던 기관총들을 지금도 기억한다. 총구는 운동장 안쪽을 향해 있었고, 군인 대장의 명령에 줄 지어 있던 사람들이 꼬꾸라지는 것을 보았다. 군인은 운동장에서 서쪽 북쪽으로 사람을 갈랐다. 어디에 서있냐에 따라 운명이 갈렸다.

"군인이 제주시로 나갈 사람은 교문 앞으로 나오라고 했어요. 사람들은 살려주나 싶어 우르르 나갔는데 탕 탕 탕 총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다시 운동장 안으로 어망 손을 잡고 돌아오는데, 시신이 산더미였어요. 배 위에 다른 사람 사타구니가 박혀있고, 고동색 진득한 피가 흙에 물들어 앉아서 덜덜 떨고 있었지요. 그때 저 멀리서 사격중지하라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제주 4·3 민간인 학살 현장 중 하나인 북촌마을. 당시 이 일대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비석은 스러져간 희생자들의 모습이다.

아이, 여성 누구 할 것 없이 총에 맞아 죽었다. 군인은 북촌마을을 빠져나가며, 초가집에 불을 질렀다. 바람에 불길이 종잡을 수 없이 커지자 고 씨도 어망 손을 잡고 함덕으로 피난을 갔다. 쌀은 구경도 못하고, 파래를 먹거나 소나무껍질로 굶주린 배를 채웠다. 고 씨는 비명소리 가득한 북촌마을을 잠시 떠나 살기도 했지만, 결국 돌아와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다. 북촌마을서 7년째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고 씨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4·3 70주년을 기념해 대통령의 제주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80살을 바라보는 지금, 1기 북촌국민학교 동창 중에 이제 3명만 살아있어요. 잘못한 사람의 책임을 물어야 한이 좀 풀리겠죠.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유가족, 드러내지 못한 고통의 세월 = 이도식(69) 씨는 2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4·3이 아니었다면 사진으로만 기억하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보기도 하고, 응석도 부려봤을 테다. 아버지 이현필 씨는 당시 27세에 희생당했다.

때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주에 비극이 다시 찾아왔다. 예비검속을 발동해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문제를 일으킬 것 같은 자'를 미리 잡아 가두기 시작했다. 희생자 대부분은 교사, 공무원, 이장 등 지식인이었다. 당시 면사무소 서기였던, 이 씨의 아버지는 집에 있다가 붙들려간다.

이도식 씨

"나는 어려서 기억도 못해요. 어머니는 저를 안고, 아버지가 끌려가는데 저항도 못했다고. 어머니는 그날 일을 입 밖으로 내는 일이 잘 없어요. 할아버지가 아들을 잃은 설움과 부당함에 격노하셨죠. 그 뒤로 유족회를 만드는데 앞장섰고, 아버지 얘기도 할아버지를 통해 들었어요."

이 씨의 아버지는 온전한 시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50년 7월 16일 섯알오름에서 20명이 총살당하고, 웅덩이에 내던져진다. 차례로 3차에 걸쳐 250여 명이 학살된다. 경찰은 가족들이 시신 수습을 못하게 철저히 감시한다. 5년이 지난 뒤에야 당국의 허락을 받아내 1956년 5월 18일 유해를 수습한다. 썩고 문드러져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뒤엉킨 유해를 수습해 뼛조각을 맞췄다고 한다. 그래서 '조상은 100명이지만 자손은 하나다'는 뜻으로 유족회 이름을 백조일손유족회로 지었다고.

제주 섯알오름 입구에 있는 최평곤의 '파랑새'는 평화를 상징한다. 지난해 제주 비엔날레 당시 세워진 작품이다. 최평곤은 동학 농민군들이 사용했던 죽창에서 영감을 얻어 대나무를 엮어 만들었다고 한다.

서로 다른 날 태어난 이들이, 같은 날 죽은 비극. 그 비통함은 말을 잇기조차 힘들게 한다. 할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은 백방으로 시신을 수습하려 했다. 사춘기를 보내며 이 씨는 죽음의 문턱을 여러 번 두드렸다. 살아남은 자도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연좌제 때문이었다.

"열아홉 살 때 방황을 참 많이 했어요. 한 2년 동안 산방산에 그렇게 올랐지요. 떨어지려고 몇 번이나 그랬는데, 결국 이렇게 살아 있어요. 그래도 지금은 산방산이 날 살렸네 생각하며 모슬포를 잠시도 떠나지 않고 살고 있어요."

기억하기 힘든 질문을 하는 내내 편치 않았다. 먼 산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히며, 터져나오는 탄식에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그래도 "내 얘기 들어줘서 참으로 고맙수다" 그 말에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고.

한국전쟁 발발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예비검속'을 지시한다. 이때 마을의 젊은 지식인이 마구잡이로 잡혀가 이곳 섯알오름에서 집단 총살 당한다. 그 인원이 무려 252명이다.

[제주 4·3이 머우꽈?]

-치유되지 못한 현대사의 상처

4·3사건은 아픈 역사다. 1947년 미군정기에 발생해 우리나라 정부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으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그중에서는 '4·3'은 1948년 4월 3일을 가리킨다. 이날은 제주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무장봉기 신호탄이 오른 날이다. 지금도 일부 우익 단체들은 남로당이 이념적인 이유로 폭동을 일으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2003년 10월 15일 노무현 정부 때 공식 확정된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에서도 밝혀졌듯이 4·3사건은 1947년 '28주년 3·1절 기념대회'를 기점으로 한다. 3·1절 기념대회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정신을 기리며 열렸다. 당시 제주도민 3만여 명이 모였고, 이는 미군정 체제하에 친일경찰이 재등용되고 강제 공출로 궁핍한 삶에 대한 항의였다. 그런데 시위 도중 경찰이 타던 말발굽에 아이가 치여 넘어졌고, 항의하는 군중을 향해 경찰이 총을 발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한다. 미군정은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시위자 일제 검거에 나선다. 이후 도민들은 학교, 관공서, 가게 문을 닫고 총파업을 벌였다. 이에 미군정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해 더 강하게 탄압한다. 특히 1948년 11월 이승만의 계엄령 선포로 '초토화 작전'이 본격화된다.

4·3사건 인명피해 규모는 무려 2만 5000~3만 명 정도이고, 이는 제주 도민의 9분의 1에 해당한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원회)는 2002년 처음으로 희생자 심사를 해 현재(2017년 7월 25일)까지 희생자 1만 4232명과 유족 5만 9426명을 결정했다. 실제 신고된 희생자 수가 진상규명위원회가 추정한 인원보다 적은 이유는, 그동안 4·3사건 언급을 금기시한 탓에 50여 년이 지난 후 희생자 파악에 나선 것이 크게 작용했다. 4·3을 직접 겪은 이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사망했거나, 가족이 몰살돼 희생 여부를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희생자들은 '빨갱이'로 매도되고, 유족들은 숨죽여 울며 연좌제로 말미암아 피해는 대물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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