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나고 싶어라~

진해만 한가운데 둥실 떠 있는 가덕도. 맑은 날이면 남서쪽에 거제도가 보이고 왼편 동남쪽으로는 일본 대마도가 가물거린다. 용원을 떠나면서 바라볼 때 입도 호남도 토도, 조금 더 서쪽으로 송도 연도가 잇달아 동동거린다.
바닷물에 절어 아래쪽이 거뭇거뭇한 바위들, 그 위로 솔을 인 언덕바지들이 푸르름을 뽐낸다. 바위 틈새나 모래바닥에 퍼져 앉은 낚시꾼들이 전체 풍경과 어울리지 못하고 낯설어 보이기도 한다.
달리는 뱃머리에서는 눈 같이 하얀 물결이 일어난다. 어버이와 함께 나온 아이들은 어른들 불안한 눈길에도 아랑곳없이 물결이 즐겁고 바람이 시원해 한껏 난간에다 몸을 기댄다.
얼마 안 있어 병산열도가 성큼 다가서면 대항 선착장, 가덕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곳이다. 대항(大項)을 우리말로 풀면 큰 목이 되는데 아닌 게 아니라 네 발 짐승 같이 생긴 전체 모양에 견주면 딱 목덜미에 해당하는 곳이 대항이다.
대항은 첫 느낌이 포근하다. 대부분 항구들이 그렇듯이, ㄷ자 모양으로 뭍을 파고 쑥 들어간 얕은 바다라서 물결은 잔잔할 수밖에 없다. 가운데에는 옛적에도 배를 대기 좋았을 만큼 모래와 자갈이 깔려 있지만 바깥으로 나갈수록 삐죽 솟아오른 갯바위들이 우람한 어깨를 내보이며 감싸안고 있어 포근함을 더해준다.
연대봉(459m)은 대항의 왼편에 있다. 매표소를 지나 마을 안쪽으로 몇 걸음 들어간 다음 2층 양옥을 끼고 왼편으로 돌아서면 연대봉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만난다. 임도는 사람들을 껴안은 채 바다를 끼고 빙빙 돌면서 올라간다.
하늘은 맑은데 바다는 맑지 않다. 가벼운 안개가 오후가 되도록까지 흩어지지 않는 것이다. 바닷물은 탱글탱글한 탄력으로 내리쬐는 햇살을 되쏘아 붙이고, 멀고 가까운 섬들은 흐릿한 안개에 아랫도리를 숨기고 있어 마치 섬 전체가 물풀처럼 떠다니는 듯하다.
임도는 가뭇없이 수풀 속으로 들어간다. 도리없이 서늘한 그늘을 따라가다 오른쪽으로 틀어 오르면 다시 너른 바다가 뿌연 안개 속에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대로 자란 소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도 따라 좋아진다.
산마루에 오르는 오른편에는 감투 같은 바위가 우뚝하고 정상 바로 옆에는 96년 복원한 봉수대가 서 있다. 봉수대 뒤편에는 ‘대삼각점’이라고, 일제가 1910년 측량을 위해 만든 기준점 표지가 있는데 “국가 중요 재산이므로 훼손하면 처벌을 받는다”고 적혀 있다. 일제는 이렇듯 한 치도 어김없이 한 줌도 남김없이 땅과 겨레를 모조리 꼴깍 삼키기 위해 애를 썼다는 것이다.
보고 있으려니까 드는 생각 한 자락. 일제가 깔아놓은 철도를 두고 착취.수탈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결과적으로 근대화를 앞당겼다는 논리를 펴는 일부 수구 세력들이, 이 기준점을 보고도 일제가 토지제도와 측량의 근대화를 이룩했다고 할 것인지 사뭇 궁금해진다.
어쨌거나 산마루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자뭇 호탕해진다. 폭 패인 곳마다 이룬 항구와 마을이 조그맣게 내려다보인다. 게슴츠레 뜨고 바라보는 눈길은 산자락을 따라 훑어 내려가다 풍덩 바다에 몸을 담근다. 안개가 빙 둘러서 있는데 그 속에 보일 듯 몸을 숨긴 섬과 여와 갯바위들은 터지는 웃음을 감당하지 못해 채 돌아서지도 못하고 킬킬대는 듯하다.


△가볼만한곳-가덕도 남쪽 끝 외양포

외양포(外洋浦)는 가덕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바깥 바다로 열려 있는 포구쯤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일제 때에는 여기에 육군 포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마을 들머리에서 조그만 나무 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할머니들은 손으로 항구 왼편을 가리키며 “여짝에다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일제가 들어오면서 쫓겨나갔제, 마을에 살지를 못했어” 한다.
사람들은 일제가 물러난 뒤에 돌아와 적산가옥을 그대로 물려받아 살았다. 아마 군대 막사로 썼을 법한 건물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무슨 창고처럼 길쭉하게 지어진 건물이 여러 채 널려 있다. 현관 개념이 없는 군대 건물답게 지금도 신발들이 바깥에 나와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안과 밖은 대문이 아니라 유리창을 달린 얇은 여닫이문으로 구분되고 있다.
벽돌로 틀을 잡은 우물도 세 개인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삭다 못한 밧줄이 녹슨 도르래에다 여지껏 몸을 기댄 채 그대로 있다. 아마도 나중에 일제 시대를 무슨 영화로 찍을 때 훌륭한 배경 무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마을 왼쪽 뒤편으로는 1.2km 떨어진 자생 동백 군락지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다. 산길 따라 가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오른쪽으로 틀면 뭔가 모르게 서늘한 기운이 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일제가 방공포를 설치했던 데다. 들머리에는 한자로 ‘사령부 발상지’라고 새긴 비석이 서 있다. ‘명치 38년 4월 21일 ○○○/ 동년 5월 21일 외양포’라고 적힌 비면 뒤로 돌아서면 ‘소화 11년 건(建)’이라는 글자가 나온다. 명치 38년은 1904년이고 소화 11년은 1936년이니 일찍 시작해서 오랫동안 지은 셈이다.
포를 숨겼음직한 굴 두 개가 나란히 있고 날카롭게 각도를 지어 튀어나오거나 들어간 콘크리트 구조물들은 얼룩덜룩 입혀 놓은 위장색을 뒤집어쓴 채 죽 달아 서 있다. 깊이가 3m 가량 되도록 판 다음 만든 것 같은데 크지는 않으나 위에다 풀을 꽂는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위장하면 절대 맨 눈으로는 찾아내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이같은 시설물에 대해 안내나 설명을 해 주는 표지는 마을 안팎에 전혀 없다. 어찌 보면 치욕의 현장일 수도 있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일제 침략의 야만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문화유적’이랄 수도 있지 않은가. 역사를 능동적.적극적으로 풀이하고 오늘에 되살리려는 노력이 행정관청에는 없는 듯해 아쉽기만 하다.


△찾아가는길

가덕도는 원래 경남 땅이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1914년 창원군 80년 의창군 소속이었다가 89년 부산 땅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같은 자취는 가덕도 들어가는 배편이 부산이 아닌 진해 용원 한 군데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용원 선착장(055-552-7665)에서는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배가 뜬다. 평일에는 2시간마다, 휴일에는 1시간마다 있다. 1시간 가량 걸리는데 장항~두문~천성을 거쳐 대항에 들렀다가 외양포로 간다.
휴일에는 시간에 맞춰 가도 별 의미가 없다. 시간을 맞췄어도 사람이 많으면 탈 수 없고 또 사람이 밀리면 좀 있다 배가 뜨기 때문인데 운 좋게도 다른 항구는 거치지 않고 대항으로 곧장 가는 배편이 걸리면 40분도 채 안 걸려 대항 마을에 닿을 수 있다.
아마 바닷배니까 배삯이 비싸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리 비싸지 않다. 대항까지 가는 데 어른은 2000원, 어린아이는 1000원밖에 안든다. 식구들끼리 어울려 산과 바다를 모두 맛보며 하루 정도 즐기기에는 그야말로 안성마춤이다.
용원 뱃머리까지는 국도 2호선을 타고 가면 된다. 국도 2호선은 진해 시가지를 벗어나 풍호동에서부터는 거의 고속도로 수준이다. 시속 80km로 정해진 규정 속도를 지키더라도 시내에서 20분이 걸리지 않는다.
자가용 대신에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된다. 시내에서 105번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바로 용원이다. 일제 포대 유적이 있는 외양포 마을은 대항 마을에서 전봇대 따라 오른편으로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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