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츠린 마음 활짝 탁 트인 풍경에 피로가 훌훌
눈바람 날리던 어느 봄날 환주산 산복도로 동네로
작은 집·꼬부라진 길…'낡은 느낌'이 멋스러워
사찰 성덕암서 본 마산만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탄성

다시, 여행을 나섭니다. 이번에는 먼 길이 아니라 산책처럼 다녀오는 여정입니다. 더러 외도를 하겠지만, 주요하게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문학관과 그 주변 동네를 돌아볼 계획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여정은 이렇게 삶이 깃든 공간 사이를 잠잠이 걷고,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며 때로 곰곰이 생각하는 '느낌여행'입니다. 첫 번째로 창원시 마산합포구 교방동에서 환주산 중턱으로 난 도로를 따라 성덕암, 문신미술관, 마산박물관으로 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춘삼월 느닷없이 눈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던 21일. 잔뜩 움츠러든 풍경 속을 걷다 역시 잔뜩 움츠러든 제 마음을 발견한 날이었습니다.

의신여중 앞에서부터 걸음을 시작합니다. 무학산 자락의 영향인지 교방동은 항상 바람이 센 편입니다. 눈바람이 우산을 날려 버릴 기셉니다. 눈을 들어 야트막한 환주산(環珠山·144m)을 바라봅니다. 산 이름이 낯섧니다. 옛날 산 정상에 구슬을 꿴 것처럼 바위가 둘러 세워져 있었다고 붙은 이름이란 설이 있습니다. 바다를 향해 말이 달려가는 모양이라고 해서 추산(趨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한자는 '달릴 추' 자입니다. 이 이름이 더 익숙합니다.

▲ 성덕암 아래 꼬부랑길벽화마을. / 이서후 기자

무학산 방향으로는 합포고등학교가 앉아 있고, 서쪽으로 산 절반 정도에 추산근린공원이 널찍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 공원 남쪽 언덕배기에 마산박물관과 문신미술관이 있습니다.

성호동, 추산동 오랜 주택들이 환주산을 에돌아 싸고 있습니다. 의신여중에서 길을 건너 이 산자락 동네로 들어갑니다. 성원어린이집 뒤편으로 난 샛길을 따라 올라가면 뜻밖에 제법 잘 닦인 도로가 나옵니다. 도로명으로는 교방남 4길입니다. 환주산 중턱을 따라 성덕암에 이르는 일종의 산복도로입니다.

도로에 올라서니 눈 아래 거침없는 도시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 풍경에 회원동 철거지역이 가득합니다. 부서지고 무너져서 자잘해진 삶의 흔적들. 세찬 눈바람 속에서 보고 있자니 마치 먼 옛날의 일 같은 풍경입니다.

도로 위아래로 낡고 작은 집들이 어깨를 움츠리고 붙어 있습니다. 색색이 벽화를 그려놓았지만 낡은 느낌은 그대로입니다.

사실 이 '낡음'이 운치를 더합니다. 가지런하지 않고 조금은 비뚤어진 담장, 말끔하지 않고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페인트칠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에는 시간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보고 느낄 것이 많지요. 때로 퇴색한 시멘트 담벼락 틈에서 비어져나온 푸른 생명에서 준엄한 삶의 자세를 배우기도 하듯이 말이지요.

환주산 산복도로를 따라가다 보니 꽤 사찰이 많습니다. 산의 기운이 남다르다는 생각 때문인 듯싶습니다. 풍수지리에서 보면 무학산이 이름 그대로 학이 날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면 환주산은 학의 주둥이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옛날에는 산 정상에 서면 마산 앞바다를 포함한 마산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을 겁니다.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사후 세계나 종교 같은 개념을 만든 게 신석기인들입니다. 마산 지역에도 신석기인들이 살았다면 아마 환주산을 신성시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환주산 정상에 둥글게 서 있었다는 바위들이 어쩌면 그 증거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환주산 사찰 중에 으뜸은 역시 성덕암입니다.

부산에 있는 범어사의 말사로 1933년 창건했습니다. 독특한 것은 이 사찰에 산신각도 있고, 용왕각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산신각은 산신령을 위한 것이고요, 용왕각은 용왕을 위한 것입니다. 이 둘이 다 있는 사찰이 전국에 몇 개 없다는군요.

▲ 시멘트 틈에서 비어져나온 푸른 생명에서 준엄한 삶의 자세를 배운다. / 이서후 기자

곡선도로를 지나니 풍경이 한 번 바뀝니다. 이제는 마산 앞바다를 바라봅니다.

성덕암에 거의 닿았을 즈음, 돌풍에 들고 있던 우산이 날아갑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마주 오던 차에 가서 부딪혀 버립니다. 문짝이 제법 긁혔습니다. 차 주인이 신경질을 내며 내립니다. 근처 어디 사찰에서 일하시는 분인 듯 했습니다. "새차인데 이거 어떡할 거예요!" 당황한 탓에 선뜻 대답을 못합니다. 결국 정비소에 차를 맡긴 후 정비소 사장을 통해 연락을 달라고 하고 헤어졌습니다.

잠시 멍하게 섰다가 성덕암으로 향합니다. 성덕암의 핵심은 사실 산신각도 용왕각도 아닙니다.

마산 앞바다를 포함한 도시 풍경을 보기에 성덕암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풍경을 보도록 일부러 난간을 설치하고 의자를 갖다 두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아까 있었던 일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 그런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눈바람은 여전히 세차고, 어쨌거나 풍경 사진을 찍어야겠기에 난간에 올라서서 휘청대고 있자니 스님이 기겁을 하고 뛰어나옵니다. "이 사람이! 그러다가 떨어져 죽어요!"

▲ 성덕암에서 바라본 마산 풍경. / 이서후 기자

원래는 성덕암을 통해 문신미술관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그 문을 잠가놓았더군요. 추산동 꼬부랑길벽화마을을 지나서 갈 생각으로 돌아 나오는 길 아까 차 주인이 차를 맡겼는지 정비소 사장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30만 원이라고요?" 전화를 끊고 성덕암 쪽을 뒤돌아봅니다. 부처님이 내 목숨 값으로 30만 원을 받아가셨을까요? 생각해보니 요즘 일에 치여 잔뜩 움츠리고 살았다 싶습니다. 이런저런 업무들이 진척이 없었고, 사소하게 불행한 일들이 자꾸 벌어졌지요. 조급한 마음들이 일을 더욱 꼬이게 했던 겁니다. 움츠린 마음을 쫙 펴고 활개를 치라는 부처님의 뜻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눈바람에 젖어 더욱 선명한 꼬부랑길벽화마을을 지나 문신미술관과 마산박물관을 차례로 둘러봅니다. 가만히 내딛는 발걸음이 담담합니다. 다시 의신여중 앞으로 돌아오니 저녁 시간입니다. 근처 돼지국밥집에 들어갔습니다. 벌써 술이 얼큰한 동네 어르신들 대화가 쩌렁쩌렁합니다. 그 곁 테이블에 혼자 앉아 우걱우걱 국밥을 삼킵니다. 어르신들의 욕설과 어우러져 창밖으로 세월의 멜랑콜리 같은 마지막 겨울 풍경이 흩날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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