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루트 따라 떠나다] (2) 프라하의 봄바람
뾰족한 지붕·거친 악센트, 볼 붉은 아이 '체코 실감'
인위적 결합 체코슬로바키아, 1968년 민주화 운동 실패
소련 해체 과정서 분리·독립, 교회 타락 비판한 얀 후스
후대에도 개혁 정신 이어져

어릴 적에는 그렇게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들이 나이가 들어 갈수록 쉽게 이해되고 다가오는 것은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여행이라는 것도 나이 듦에 따라 그 묘미도 변하게 마련인 것 같다. 한때는 바다나 가슴 싸한 곳을 찾아 떠나고 싶었던 것이 나의 여행이었다면 지금의 여행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말이다. 가끔씩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좀 더 일찍 알았다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내가 어렸을 때에 몰랐던 것은, 현재 나로 하여금 미지를 찾아 떠나게 해 준 길 안내자가 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깨달은 날 나는 이런 글을 썼다.

<류시화에게> 

지금 알고 있는 것 그때도 알았더라면 / 그것은 파멸 / 아름다웠던 내 청춘의 파멸 / 텅 비워졌었던 내 머리의 파멸 / 너를 너로만 보았던 내 과거의 파멸 / 늦게 안다는 것은 / 살아가면서 조금씩 깨닫는 것은 /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듯 / 불현듯 기막힌 생각으로 무릎치고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가듯 / 펄떡이는 물고기 되게 하는 것 / 내일 또 너를 기대하는 것

나에게 하나의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었던 프라하로 떠나기 위해 비엔나 중앙역에서 59.6유로짜리 2등석 열차에 오른 것은 아침 6시, 프라하의 봄바람이 불어 '올 뻔 했던' 바츨라프 광장은 비에 젖어 있었지만 주변의 상가는 비가 오는 날임에도 문전성시를 이뤘다. 비엔나에서 체코 국경까지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국경의 개념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국경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기차 승무원들의 언어가 체코어로 바뀌어 있고 검표를 하는 승무원들도 그랬던 것 같았다. 무엇보다 차창밖에 스쳐지나가는 농촌풍경과 도시의 역사(驛舍)와 거리들을 보면 이곳이 체코라는 것을 느끼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프라하 중심지./시민기자 조문환

내내 바깥만 응시했다. 산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구릉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스러져 가는 시골 역사의 창고들, 감정 없이 일렬로 서 있는 뾰족한 지붕들, 알파벳이 거꾸로 누운 것처럼 생긴 글자의 간판들, 대화 중에 들려오는 "스키스키"라는 거친 악센트들, 종착점이 가까울수록 자주 보이는 볼이 붉은 아이들.

브르노(Brno)역에 도착하니 허름한 옷차림의 한 쌍의 연인이 기차에 올랐다. 검정색 가죽잠바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젊은 남자는 초점 잃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 다시 창으로 옮겨지기를 몇 번, 여자 친구는 가끔씩 그의 어깨에 털썩 기대곤 했다. 검표원이 지나간 후 잠시 만에 나타난 험상궂은 보안관은 그를 억지로 끌어내리고서는 거세게 반항하는 그의 얼굴을 향해 액체인 뭔가를 발사하자 눈을 뜨지 못한 채 시골 역 플랫폼에 나 뒹군다. 그런 그를 부둥켜안고 흐느끼는 여자 친구의 모습을 기차가 멀어 지나도록 돌아보았다.

바츨라프 광장을 지나 구시가지 광장을 거쳐 유대인 지구를 돌아 곧장 프라하성으로 올랐다. 경계는 뜻밖에 삼엄했다. 성곽에 기대어 구시가지 쪽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는 프라하 시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가지는 마치 볼타바 강 위에 떠 있는 하나의 섬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도 뚜렷이 보이는 것은 구시가지 광장의 틴 성모교회와 유대인 거리 쪽의 회당들 그리고 몇몇 성당들이 우뚝 솟아 있을 뿐 다른 건물들은 동일한 높이와 동일한 색상으로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바츨라프광장은 20세기 초까지 소(牛)시장이었으나 1913년 바츨라프 기마상이 건립되고 이후 체코의 정치와 민주화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시민기자 조문환

입장료를 지불해야 예배당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성 비투스 대성당을 비켜 돌아 내려와 카렐교를 거쳐 다시 구 시가지로 돌아왔다. 1403년에 건설됐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예술성과 규모를 자랑하는 카렐교의 교각 위에는 30인의 성인이 조각되어 있었다. 일종의 이 도시의 수호성인과 같은 사람들이다. 19, 20세기에 들어와 대수선을 했다고는 하지만 다리 하나만 하더라도 예술과 기능성까지 겸비하도록 했던 것은 유럽의 대부분 나라들이 비슷하다.

카페에서, 점심을 먹었던 식당에서, 거리에서, 볼타바 강 위의 유람선에서,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도시 속에서, 자유분방하고 세계인종으로 넘쳐났던 프라하 역사 속에서, 도시의 한 모퉁이를 휘감아 돌아가는 붉은 트램들 속에서 프라하의 봄을 느끼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봄은 몸부림 속에서 오는 것, 두꺼운 얼음을 뚫고 올라오는 것, 이기고, 물리치고, 바위를 깨고 샘솟아 오르는 것, 바라만 본다고 봄은 오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기에 프라하의 봄이 오기까지는 숱한 세월과 상처를 겪은 후에 가능했으니 우리나라나 비슷한 전철을 밟았을 나라들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은 소련의 군사개입으로 봄의 문턱에도 가 보지 못한 채 다시 엄동설한을 맞이하였으니 차라리 봄기운 자체가 없었던 것만 못하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체코슬로바키아에 봄기운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은 1992년 소련(소비에트연방) 해체에 기인한다.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국가였던 이 나라들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과 언어가 다름에도 비슷한 언어의 슬라브족이라는 이유로 하나의 국가로 결합됐으나 1992년 74년 만에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소련과 동유럽의 연쇄적 붕괴는 슬로바키아의 중공업을 붕괴시켰고 이것이 연방해체를 촉발했다. 인위적으로 통합됐던 두 나라가 분리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 얀 후스는 1414년 종교재판 후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동상은 순교 500주년을 맞아 구 시가지에 세워졌다./시민기자 조문환

프라하 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스쳐 지났던 얀 후스의 동상에서는 내 가슴이 뜨거워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랬기에 뜨겁게 불어올 프라하의 봄바람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서슬 퍼렇던 교황과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통렬하게 비판하다가 교황에게 파문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던 그의 정신이 이 도시에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라하의 봄은 저만치, 저만치에서 오고 있다. 빗속에 비엔나로 돌아오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는 타고 왔던 그 열차와 동일한 흑장미 계열의 검붉은 색 톤이었다. 기차들이 비에 짓눌려 떠나기 싫은 말처럼 꼬리를 축 내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기차바퀴가 움직이고 그 바퀴소리에 섞인 내 귀의 환청, 비 오는 한낮 시골 기차역 플랫폼에 내동댕이쳐진 집시 연인들의 그 외침이 빗소리에 섞여 울렸다. 프라하는 가을비도 "스키스키" 소리 내면서 내린다. /시민기자 조문환(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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