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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본 경남 50장면] (5) 경남 3·1운동 - 상편

"나라 없는 백성은 개나 닭과 마찬가지"

임종금 기자 lim1498@idomin.com 입력 : 2018-03-06 14:07:05 화     노출 : 2018-03-06 14:16:00 화

농민을 더 분노케 한 종자개악사업

헌병경찰의 공포 통치, 토지조사사업과 임야조사사업으로 농토를 빼앗긴 조선 농민들에게 또 하나의 시련이 닥쳐온다. 바로 종자개악사업이었다. 물론 일제는 이를 '종자개량'이라고 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쌀과 원료 공급처로 만들고자 했다. 1910년대부터 쌀과 면화, 누에고치, 소 등이 집중적으로 수탈대상이 됐다. 특히 가장 중요시한 것은 쌀이었다. 일제는 쌀을 수탈하기 위해 한반도에 맞는 전통 종자를 폐기하고, 일본인 입맛에 맞는 쌀을 재배하도록 강요했다. 이는 다른 사업보다 더욱 강력하게 추진돼 1912년 일본식 쌀 재배면적이 2.8%에 불과했으나 1921년에는 61.6%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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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당시 일제의 학살로 황폐화된 서울 제암리 모습.

조선 농민들은 당시 나름 대로의 노하우와 종자개량을 통해 농업을 발전시켜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전래의 농법과 토질에 맞지 않는 쌀을 억지로 심어야만 했다. 이는 조선 농민들이 수백 년 간 쌓아온 농업구조를 뿌리부터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농민들이 일본식 종자 심기를 거부할 경우 헌병경찰과 행정력이 동원됐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구장(이장), 면 서기, 경찰이 전통 종자가 심긴 모판을 짓밟았다. 밭에는 일본의 면방직 공업을 위해 뽕나무 심기가 강요됐다. 식량을 생산해야 할 밭이 누에고치 먹이인 '뽕잎 생산기지'가 됐다. 이렇게 억지로 키운 누에고치는 헐값에 수탈돼 일본 면방직 공장으로 향했다.

3·1운동 직후 놀란 일제는 전국적으로 '조선인의 불만'을 모았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종자개악사업을 언급될 정도로 이 문제는 알려지지 않았던 3·1운동의 핵심적인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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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들이 발행한 일제 만행 사진첩.

전염병 창궐과 움직이는 사람들

조선 민중들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를 무렵, 식민지 조선에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1918년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 한 스페인 독감으로 조선인 과반에 가까운 무려 758만 8000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이 가운데 14만 명이 사망했다.

지옥 같은 겨울을 넘긴 조선인들에게 이번엔 콜레라가 닥쳤다. 콜레라는 1821년 처음 조선에 번진 이후 여러 차례 유행했지만 잠시 뜸하다 1919년 중국과 함께 한반도를 덮쳤다.

일제는 별도의 위생과 전염병 전담 조직을 만들기보다는 기존 헌병경찰 제도를 활용한 '위생경찰' 제도를 시행했다. 경찰업무에 위생업무를 맡김으로써 위생점검이라는 명목으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경찰들이 더욱 넓고 깊게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생경찰은 전염병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수탈로 체력과 면역력이 약화한 조선인들에게 위생점검은 실효성이 없는 그저 강압적인 행정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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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레라 발병 마을 모습.

일제가 대처를 못 하는 사이 식민지 조선인들은 속절없이 쓰러져갔다. 일제의 공식집계에 따르면 1919년 한 해에만 1만 6915명이 감염돼 1만 1084명이 사망했다. 치사율은 65.4%에 달했다. 다음 해인 1920년에는 더욱 심했다. 2만 42229명이 감염돼 1만 3588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이는 실제 피해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1920년 여름 제주도에서만 불과 4개월 사이 4134명이 콜레라로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실제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인과 교류가 많은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환자가 많았고, 영남권에서는 동부경남을 중심으로 부산, 동래, 언양, 울산, 거제, 마산, 의령, 함안 지역에 콜레라 환자가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3·1운동 전후 일어난 전염병 유행은 일제 통치조직이 수탈과 억압에만 특화돼 있을 뿐, 조선인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시켜주었다.

한편, 1917년 러시아 혁명·1918년 1차 세계대전의 종전-민족자결주의 제창으로 지식인·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었다. 연해주와 만주에는 러시아로부터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때 의령 출신 안희제와 초기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에서 사회주의 영향을 받고 국내로 들어온다. 또한 일본에서는 동경·와세다·메이지대학 유학생을 중심으로 아나키즘·사회주의 사상이 대두된다. 이들 유학생 가운데 경남 출신 리더는 없었지만, 부산항을 통해 일본을 오가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항구를 중심으로 점차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사상이 퍼져 나갔다.

이렇게 해서 1919년 2월 1일 만주와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흔히 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 하는 이 독립선언서는 독립운동가 39명이 서명했는데 경남 출신으로는 손일민(밀양 출신), 황상규(밀양 출신) 등이 있었다. 무오독립선언서에는 무력으로 주권을 쟁취하겠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일주일 후인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민족자결주의를 핵심으로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고, 만국평화회의에 조선민족독립을 호소한다는 내용이다. 만일 이를 일제가 방해할 때는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참화는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는 내용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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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 콜레라 상황 지도. /출처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고종 황제의 죽음, 운동이 시작되다

이 상황에서 1919년 1월 21일 공교롭게도 고종 황제가 의문사한다. 고종 황제는 1864년 1월 16일부터 1907년 7월 20일까지 재위했다. 또한 퇴위 이후에도 사실상 황실의 어른으로서 상징성이 컸다. 대부분의 민중들은 고종 황제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 군인 겸 외교관인 카를로 로제티는 고종 황제에 대해 "아시아의 다른 나라 군주들처럼 종교적이기까지 한 경외심을 갖고 바라보는 존재는 아니지만 모든 백성들로부터 보편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고 기록했다.

고종 황제가 죽자 많은 지역 유생들이 서울로 향했으며, 상당수의 백성들도 경성(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이를 지식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놓치지 않았다. 3월 3일 고종 황제 장례식 전후를 기점으로 전국적인 시위를 기획하고 당대 최고 문필가인 최남선에게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을 맡겼다. 최남선은 민족대표 명단에는 빠지겠다는 조건으로 독립선언서 초안을 썼다. 이후 독립선언서는 한용운의 수정을 거쳐 2월 27일 천도교(동학)에서 운영하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인쇄됐다. 총 3만 5000장이 인쇄됐다. 독립선언서는 인쇄 도중 친일 형사인 신승희에게 발각됐으나, 천도교 지도자인 손병희가 즉석에서 거금 5000원을 쥐여주고 무마시켰다.

3월 1일 오후 3시께 소위 민족대표 33인(실제로는 모인 이들은 29인)은 현재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읽고 곧바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에게 연락해 일제 경찰에 자수한다. 민족대표들의 어이없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경성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곧이어 군중들이 합류함으로써 3·1운동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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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 황제 1919년 1월 승하 며칠 전 나들이.

경남지역은 3월 1~2일께 기미독립선언서가 이미 들어와 있었고, 3월 3일 부산과 마산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됐다. 경남에 독립선언서 배포한 이는 이갑성과 배동석이었다. 이갑성은 3월 1일 오전 독립선언서 200장을 배동석에게 맡겨 마산지역 독립운동가인 임학찬, 박순천에게 보내도록 한다. 부산은 서울에서 학생대표가 직접 내려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후 태극기도 제작했다.

경남지역 최초 만세운동 시점은 기록마다 다양하다. 3월 5일 마산 설, 3월 8일 진주 설, 3월 9일 함안 연개장터 설이 있다. 분명한 것은 3월 초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경남 전역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됐다는 점이다. 일제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경남 전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만세운동 초기에는 유생, 당시 200만 교인을 거느린 천도교, 기독교계, 학생들이 중심이 됐으나 곧이어 농민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전국민적 시위로 이어진다. 특히 일본과 가까운 경남에서는 일제에 의한 수탈이 다른 지역보다 더 일찍, 더 철저하게 이뤄졌으므로 일제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다. 따라서 경남지역 3·1운동은 단순 집회시위를 넘어 훨씬 더 격렬해졌다. 당시 가장 격렬했던 곳 중 한 곳인 합천군 삼가에서는 "나라 없는 백성은 개나 닭과 마찬가지다!"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다음 편 예고: 경남 3·1운동-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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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 황제 장례식 운구 행렬.

참고문헌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적지 부산·울산·경남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2010

-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1990

- 신동원,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역사비평사, 2009

-「1920년대 경남지방 야학활동」, 최윤경, 1997

-「일제하 진주지역 천도교의 문화운동」, 김희주, 『동국사학』 55호, 2013

-「우리나라 감염병관련 법률 및 정책의 변천과 전망」, 천병철, 2011

- 정운현, "독립선언서에 얽힌 기막힌 일, 이 사람이 없었다면", 오마이뉴스 2017년 2월 28일 자

- 신동원, "[의학속사상]위생경찰, 식민조선 만병골치약", 한겨레 2006년 3월 23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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